나의 길

나의 암울 시대를 건너는 법 2/ 민주화를 위한 그 시절을 암울 시대라고 말하기보다 여명 시대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청솔고개 2020. 7. 30. 16:02

나의 암울 시대를 건너는 법 2

                                                                              청솔고개

   요즘처럼 환한 햇살이 그리워지는 긴 장마철에는 다리를 건너다보면 갑자기 불어난 천변의 강물 소리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잘 볼 수 없었던 큰물이 다리 밑으로 콸콸거리고 흘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막혔던 그 무엇이 확 뚫어지는 시원한 느낌과 더불어 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 생각에 한참 머문다. 내가 살아온 시간도 저렇게 흘러왔을 텐데. 다만 시간의 흐름은 강물의 흐름처럼 볼 수 없고 그냥 관념상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은 그냥 흘러간다고만 알고 있으니 그 체감 도는 훨씬 떨어질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꽃이 만발한 봄날 오후나 늦은 밤, 꽃그늘 속을 혼자 거닐면서 온갖 생각에 잠기고 싶다.

   문득 나의 20대 전반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 본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와 정치 현실을 극히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많지 않다고 본다. 특히 민주주의의 성숙도 측면에서는 많이 발전, 성장했다고 대내외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존중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태도 역시 다양성을 본질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양성을 분열로, 단결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아직도 통일, 획일주의, 단결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창하는 인사들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50년 전 쯤, 나의 20대 초반 시절, 당시 우리 사회는 어떠했는가. 나는 그 때 막 대학입학을 한 시기였다. 나는 대학의 담 바로 옆 하숙집에서 한 학기 하숙 생활을 했다. 주인은 퇴직 교원이었는데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꾸며서 차려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하숙집 주인어른은 아들 있는 데 다니러 온 우리 아버지와 전 현직 교원이라는 공감대가 작용했는지 몇 차례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나에게는 좀 각별히 대해 주었다. 당시 하숙집 분위기는 참 다양했다. 주말에는 소주나 맥주 한 병 내기를 위한 내기 화투를 치는 패들에 어울려 보기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소주 맛을 보았다. 입에도 댈 수 없는 쓴 맛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 그렇게 좋다고 마셔대는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한 구석에는 학생 운동 패들의 모임도 활발했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의 회합은 다소 자유로웠던 것 같았다. 그 멤버들이 대여섯 명씩 운동권 대표 격이 묶고 있는 한 하숙방에 모여서 하도 담배를 많이 피워대는 바람에 장지문 틈으로 연기가 스멀스멀 새 나올 정도였다. 굴뚝 안에서 뭔가를 숙의하는 것이었다.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도 그게 캠퍼스 벽이나 요소마다 붙일 규탄 구호를 담은 벽보나 아니면 학생들에게 돌릴 이념 홍보 책자에 대한 논의 같았다. 그 때는 아직은 비교적 학생운동이 자유로웠을 때였다. 당시 제3공화국 개발 독재에 저항하는 이른바 반체제 움직임이 그 하숙방에서도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몇 달 동안 룸메이트였던 한 해 선배는 그 활동 단체의 부회장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나보고도 몇 차례나 은근히 자기 모임에 합류하기를 권유해 왔다. 나는 단박에 그 선배의 청을 거부하기보다는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고만 말했다. 나 나름대로의 젊은 의기는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 운동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교육공무원이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가해질 아버지와 집안에 대한 불이익이 두려웠던 것이다. 집 떠나 공부하라고 해 놓았더니 금하는 학생운동이나 해서 가족에게 누를 끼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남매 맏이인 나로서는 그런 일은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처지였던 것이다. 그 학생 운동 역시 근처 정보기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1학년 첫 학기 끝 무렵부터 이들의 동태파악을 위한 정보요원들의 첩보활동은 시작되고 있었음을 둔한 나로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 중 한 학생운동권 부회장이었던 룸메이트 선배가 사라졌다. 돌연 입대를 단행하였다는 것을 가을학기가 시작된 후 알았다. 그 선배는 결국 그해 가을학기의 대대적인 학생운동 탄압과 검거를 예견하고 미리 피신한 것은 나중에 알 수 있었다. 그 선배가 다음해 봄에 첫 휴가 와서 학교캠퍼스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보하는 것이 참 낯설어 보였다. 근처 파출소 담당 형사의 순찰도 잦아졌다. 그 사실은 내가 등하교하거나 볼일 보러 갈 때 한 번씩 나를 불러 다른 방의 멤버들의 동향을 슬며시 묻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사실대로 아는 바 없다고 답변할 뿐이었다. 정말 아는 것도 없었다. 지금도 벌겋게 충혈이 된 그 담당 형사의 눈길이 기억난다. 은근하나 뭔가 캐내기 위한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숙집 주인어른이 구독하고 있었던 지방지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된 기사를 우리한테 보여주었다. “**회 주모자 ***, ***…….”의 반체제 활동 혐의자에 대한 지방법원 선고 기사였다. 그 동안 활동한 멤버들의 계보도와 활동 내역도 상세히 실려 있었다. 주인어른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된 게 참 아깝고 안됐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야들 부모는 억장이 무너질 텐데…….” 하고 보탠다. 물론 우리 하숙집 그 멤버들과 직접 관련된 건수는 아니었다. 이처럼 다른 데서도 이미 왕성하게 학생운동의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 끝에 결국 그 이듬해 1972년 가을에는 ‘10월 유신(維新)’과 이에 따른 긴급조치법 발동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도래하였다. 나의 대학 2학년 가을학기는, 1학년 때의 교련반대 및 공납금 인상 반대라는 비교적 온건한 시위에 이어 격랑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학 3학년인 1973년 가을의 ‘유신헌법’반대 시위는 그 규모나 격렬함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룩하였던 것 같다. 그 때 도서관에서 2학기 중간고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거의 전교생이 뛰쳐나와 책가방을 캠퍼스 한 군데 모아두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정문으로 후문으로 일진일퇴 공방을 하면서 피가 터지고 살이 터지는 대단한 시위였다. 그때 처음 최루탄의 매운 맛도, 신축 중인 건물의 담을 뛰어 넘어 진압 경찰의 검거 추격을 따돌려 보았던 것도 처음이었다. 한 친구는 뛰어내리다가 못에 발이 찔려 크게 다치기도 하였고, 격렬한 시위 중 그 진원지가 진압 경찰대인지 아니면 투석하던 시위학생편인지 모를 곳에서 날아온 것에 머리를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병원으로 후송되는 불상사도 발생하였다. 나도 바로 옆에서 그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내속에서도 나도 모를 이상하고 격렬한 감정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위가 이성보다는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전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전투에는 직접 참여해 보지 않았지만 전우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피해야겠다는 두려움보다 나도 모를 분노와 적의가 순간 발동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당시 시위를 주도하던 총학생회장은 역시 노회했다.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머리 터져 피가 묻은 학생의 상의를 휘두르면서 진압대의 최루탄에 의해서 이렇게 됐다면서 시위대의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타격한 물체의 진원지는 그 후에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하나 특이한 것은 시위대 속에 시위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요원이 신분을 숨기고 곳곳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일진일퇴하다가 시위 소강상태가 되면서 매점에서 쉬면서 음료수 한 잔 하는데 옆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그들끼리 서로 대화하는 것을 엿들어서 알 수 있었다. ‘시인과 혁명가’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잠재적으로 시인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시만 써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는 한계를 느끼면 행동하는 양심, 혹은 행동하는 지성이란 이름으로 실제 행동화하는 단계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나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적 낭만주의다. 실제로 1974년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구속된 같은 대학의 선배 한 분은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에 처해진 사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자그마하게 세워져 있다. 이러한 민주열사는 투신, 분신, 분신 투신, 옥사, 처형 등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우리들에게 뜨거운 메시지를 목숨으로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민주화였다. 최근세사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민주화 열사는 어느 언론에서 보도하기로 약 50명 정도 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민주화의 선구자이다. 나는 누구나가 우리나라의 발전 등 운운하면서 이들의 희생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화 지수나 언론자유 지수는 세계 상위 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거저 온 것이 아니다. 최근세사에서 수차례 정변과 사태를 겪으면서 세상을 바꾸려던 숱한 젊은이들의 목숨으로 바꾼 희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나도 낭만주의자이긴 하지만, 그래서 밤새우면서 시도 써 보았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국 행동하는 지성은 되지 못했다. 나는 비겁했다기보다는 용기가 없었다는 말로 가끔은 항변한다. 나는 지난 날 민주화를 위한 그 시절을 암울 시대라고 말하기보다 여명 시대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2020.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