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뉴욕의 늦여름 10일간의 작별/미 동부 및 캐나다 동부 기행보고서 4

청솔고개 2020. 8. 19. 22:10

뉴욕의 늦여름 10일간의 작별/미 동부 및 캐나다 동부 기행보고서 4

 

                                                                                                    청솔고개

 

   2003. 8. 18. 월 [넷째 날]

   Quality Inn 숙소에서 새벽 4시에 잠이 깨었다.

   또다시 혼자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시간, 모든 것은 정리되고 제자리를 찾아 드는 느낌이다. 문득 떠올려지는 집에 있는 아이들, 워크숍 자료 준비 등 다소 혼란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새벽 5시 ‘솔로우 일기’를 읽는다.

   “내 이웃들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동료들이다. 그러다 길이 갈리는 곳에서 나는 또다시 홀로 길 위에 서야한다. 인생의 먼 여정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두에 서서 길을 간다. 매정한 운명이 연약한 어린 아이라고 해도 눈감아 주는 법이 없다.”

 

   새벽 5시 30분. 이제는 아내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나이아가라 폭포 탐사의 날이 밝았다.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한 아침 날씨였다.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싱그럽고 환한 아침 햇살이 짙은 녹음 속에서 휘황하고 찬란하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신봉하는 국적이나 이름도 모를 숱한 여객들은 저마다 풍부하고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로비고 엘리베이터고 어디든 만나면 솔직하고 환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아침이 더욱 설레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도 제법 여유를 찾은 듯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아침 8시 25분에 출발하였다. 뜨거운 여름 날씨다.

   햇살들은 짙은 그늘을 뚫고 찬연하게 꽂히고 있었다. 말굽 형 캐나다 나이아가라[Niagara ,원주민의 말로 ‘천둥소리를 내는 물기둥’이란 뜻] 상류의 진청색 물빛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조금 전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를 건너올 때 하류의 물색을 보고 약속이라도 한 듯, 아내와 같이 탄성을 질러댔다. 강렬한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여울목 같은 폭포 상류의 짤랑이는 물결들은 이리 호(Lake Erie)에서 온타리오 호(Lake Ontario) 단애로 곤두박질한다. “와! 무지개다” 모두들 소리쳤다. 빛의 스펙트럼이다. 문득 현현한 칠색의 영롱한 무지개가 물보라와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가이드가 운이 좋으면 무지개 나이아가라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 행운을 잡을 수 있어서 좋다. 어제 비가 좀 내렸는데 날이 맑아지니 무지개가 생겼는가. 폭포 아래 강 건너는 다리이름을 레인보우 브리지라 했는데 이를 두고 붙인 이름인가보다. 엊저녁에는 소리의 향연, 오늘 아침에는 그 소리의 실체를 확인하는 물상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무지개를 끌어 안듯이 반기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가이드 미스터장이 엊그제 백악관 뜰에서 넘어져 크게 다칠 뻔했던 여객 중 가장 연로하신 분을 위하여 휠체어를 빌려서 공원처럼 꾸며진 폭포 가는 길을 밀고 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보행이 좀 더디어서 본인이 가장 부담감을 느낄 터였는데 너무나 보기가 좋았다. 직업상 이런 서비스는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어서 얼마나 흐뭇한 마음인지 모두들 한층 즐거운 얼굴이었다.

   ‘면사포 폭포[Bridalveil Fall]’ 라 이름도 정겨운 폭포 가는 길에 고개를 드니 섬 둔덕에 피어서 이쁜 미소를 띠고 있는 이름 모를 들꽃이 눈이 뜨인다. 작고 앙증맞은 옅은 남빛 꽃들의 미소가 나그네의 마음을 헤아려서 달래주는 듯하고 유구하게 이 장대한 자연의 조화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서 버스를 오르는데 하늘색 유니폼 같은 것을 입은 일단의 무리들이 눈에 뜨인다. 무척 궁금하여서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더니 율법준수를 절대 준수하는 유대인의 한 교파에서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이란다.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이른바 ‘랍비’라고 호칭한다고 했다. 역시 다 인종, 다민족이 더블어사는 합중국의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바로 세계 경제나 학문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유대인들의 우수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다시 버스로 캐나다 쪽으로 넘어와서 여기서 가장 애잔한 전설이 서린 현장을 답사하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하는 폭포소리가 신이 노한 소리라고 겁먹은 인디언들은 그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서 아리따운 처녀를 제물로 바쳤었는데 이제 그 물보라 속의 처녀를 찾아보기 위해서 '안개 속의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라는 유람선을 탔다. 최대한 폭포 가까이 접근하려면 물안개와 물보라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대비하기 위해서 얇은 우의를 지급해주었다. 처음 맞은편 배에 파란색 가운을 입은 무리들이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일순 내 눈을 의심하였는데 그게 바로 폭포 밑 탐사 복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옷 위에 레인 코트를 걸친 기괴한 모습을 한 일단은 요란한 안내방송을 시작으로 서서히 캐나다 측 폭포, 호스슈 폭포[Horseshoe Falls, '편자'라는 뜻]로 다가갔다. 벌써 왼쪽 미국 측 폭포에서는 자욱한 운무현상이 선단을 덮치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귀를 멀게 하는 굉음은 상상을 초월했고 모두들 우의자락을 여미지만 온 몸은 벌써 흠뻑 젖어든다. 내 일찍이 그렇게 큰 물기둥을 본 적은 없었다. 이런 초자연 현상의 이면에는 거의 환각적인 작용을 통하여 정녕 슬픈 얼굴을 한 인디안 아가씨의 환영이라도 나올 법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가씨의 모습을 살피는 여유는 고사하고 굉음과 물보라, 위험스레 접근하는 배의 진동으로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 같았다. 30분간의 혼돈이 가시니 우리의 정신도 가까스로 수습이 되었다.

   1678년 프랑스의 루이 헤네핀 신부가 나이아가라폭포를 발견한 이래 이 흰 구름을 솜처럼 타서 만든 하늘 절벽에 1년에 평균 500명이 투신하는데 그 중 200구의 시신만 수습한다고 한다. 모두들 이러한 초자연적 조화에 미혹되어 안개 속의 아가씨라도 만나기 위해서 제 한 몸 투신하였는가 아니면 하늘가는 지름길로 착각하였는가. 오대호[Great Lakes] 중 이제 겨우 둘만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셈이다.

 

   오전 11시다. 이제부터 드디어 일단 캐나다 동부 주요도시 여행으로 들어간다.

   걸쭉한 말솜씨의 가이드 미스터 박이 캐나다 소개에 입에 거품을 문다.

   캐나다의 상징은 바로 가나다 국기에 나타나 있는 매플인데 바로 이 나라가 단풍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특히 명물인 매플 시럽은 이 나라의 단풍의 수액 속에 들어있는 설탕성분 즉 슈가 매플을 건강식품처럼 만든 제품인데 매플 사탕, 과자 등 다양하게 개발하게 되어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리산 등지에 나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에 당분이 들어있다고 이해하면 된다나.

   

   현재시간 11시 57분. 여행단은 오른쪽 온타리오호수를 끼고 일로 북으로 질주한다.

   토론토(Toronto)까지는 44㎞로 표지판이 안내한다. 온타리오 호를 누가 호수라 하겠는가. 피안이 안 보이는 광대한 바다다. 저 나이아가라의 엄청난 수량이 이 호수로 흘러 들어서 서북쪽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는 세인트로렌스 강(Saint Lawrence River) 강이 된다. 겨울철에 바람이 극심해서 삼림도 미국 쪽보다 덜 풍부한 것 같다. 그 겨울의 엄청난 추위를 활용하여 생산한 아이스 와인이 특산물이라 한다. 포도를 그냥 넝쿨에서 월동시켜 수분을 뺀 고당질로 와인을 제조한 것이다. 300만 인구의 토론토는 캐나다의 학문, 예술, 문화의 중심지로 앞으로 차례로 방문할 금융의 중심인 몬트리올, 문화, 유적의 중심인 퀘벡과 대조를 이룬다.

 

   오후 1시에 토론토 도착했다.

   도시의 느낌은 ‘소박함, 수수함, 질서 정연함, 평온하고 안락함’으로 압축할 수 있을 듯. 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여기도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캐나다에 중국인 60만이 기거하는데 이곳에만 10만이 있다고 한다.

   1시 40분까지 한인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동포가 하는 한식당에서 귀에도 익은 비빔밥, 된장찌개, 순두부, 김치찌개, 육개장 등 차안에서 미리 예약 받은 토종 메뉴들을 선택해서 얼큰하고 시원한 우리 맛을 만끽할 수 있었다. 벽에는 우리말로 유학 및 어학연수 안내 벽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식사 후 토론토 중심가를 출발하여 천섬[Thousands island]으로 향했다.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광막한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곧게 뻗어 끝없이 이어진 길을 난생 처음 원도 한도 없이 달려본다. 약간 높은 지대로 오르면 바로 숲으로 펼쳐진 지평선이 360도 원을 이룬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의 한 주 면적은 거의 대부분이 남한보다 넓다고 하니 대략 짐작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꿈길 같은 여정의 후반을 깜박 졸음에 맡겨버렸다는 사실은 천 섬 거의 다 와서 깨달을 수 있었다. 워낙 아늑한 여정이라서 마치 대자연의 품안에서 혼곤히 잠들어 버렸다고 좋게 해석해야 할까.

 

   오후 4시 50분에 킹스톤 천 섬[Kingston Thousands island]에 도착하였다.

   무척 더웠다. 그러나 습하지는 않아 그늘에 들어서니 오히려 서늘한 느낌이 든다. 천(千) 섬은 배를 타고 구경한다. 배에 올랐다. 천 개나 되는 섬에 그림처럼 건축한 집들이 올망졸망하게 아름답다. 천 섬 방문은 과연 캐나다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 태양, 나무와 건축물들의 완벽한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졌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역광에 더욱 고귀한 정취가 느껴진다. 나는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를 번갈아 가면서 이 정경을 기록해 나갔다.

 

   늦은 오후  7시 40분에 오타와(Ottawa)에 도착하였다.

   호텔 노보 텔에 여장을 풀고 근처 한식당 ‘KOREAN GARDEN'에서 김치찌개로 입맛을 돋우었다. 식사하는데 세 아이들과 함께 여행한 한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극성스러움과 그 중 한 아이의 분별없는 행동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 아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함부로 자란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우리 아이들을 이제 정말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녁에 모처럼 아내와 같이 오렌지 안주 삼아 페트병에 담긴 소주 두어 잔 해 보았다. 여행 기록은 가능하면 중요한 자료는 그날그날 정리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졸음을 참고 가져간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 나간다. 미국의 자연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우 일기’를 참 잘 가져왔다. 이 책을 읽으면 헝클어지고 피로한 심신이 조용히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집이 걱정이 되어서 구입한 전화카드를 사용하는데 사용법이 복잡하여 말썽이다. 11시에서 30분간 통화 시도를 했는데 겨우 아이들을 돌보아주시는 큰 처형하고만 통화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20.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