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뉴욕의 늦여름 10일간의 작별/미 동부 및 캐나다 동부 기행보고서 6
청솔고개
2020. 8. 20. 22:57
뉴욕의 늦여름 10일간의 작별/미 동부 및 캐나다 동부 기행보고서 6
청솔고개
2003. 8. 20. 수 [여섯째 날 전편]
새벽에 잠을 깼다. 맑은 날씨다. 1시였다. 4시간 정도 잤으니 여행 중 치고는 푹 잤다는 말이 맞다. 제 혼자 떠드는 TV 채널을 돌려보니 7,80%는 불어로 방송을 한다. 퀘벡 주는 그래서 북미의 파리 정도로 불린다고 한다. CNN을 돌려보니 이라크의 테러사건을 보도한다. 17명 사망 100여명 부상이라고 했다. 어쨌든 테러라고 하면 미국의 중심 뉴욕이 연상되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북미 대륙의 한켠이라 생각하니 뭔가 긴장, 비장감 등이 여행의 멜랑콜리를 더해 준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꼭 통화를 해야 하겠는데 엊저녁에 캐나다 달러화로 8불이나 주고 구입한 전화카드가 말썽이다. 통화 지역이 한정되어 있고 방식도 무척 복잡하였다. 한인 종업원들이 미리 이런 점을 헤아려 전화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친절이 아쉽다. 꼭 속은 기분이 든다. 전화로 첫째의 수시 입학 결정 문제, 둘째의 근황, 특히 돌아오는 일요일에 그 다음날 월요일에 발표할 연구학교 워크숍자료 인쇄 문제 등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러한 현안에 마음이 무겁고 또 바쁘다. 되도록 이러한 현실 문제에 대해서 여행 기간 만큼은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세상 일이 칼로 두부모 자르듯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버림과 정신적 공백 상태를 얻고 싶은데 쉽지는 않을 듯하다.
나에게 분명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보존하여 남기고자하는 남다를 열정과 소양이 있는가. 암만 생각해도 그 동안 일행으로부터 들은 너덧 차례의 말 “혹시 사진작가는 아니신지요? 아니면 영화감독 같습니다.” 자꾸 들어도 별로 싫지는 않은 말이다.
아내가 새벽 3시쯤 잠이 깼다. 여행 코스 정리하면서 같이 커피도 끓여 먹고 과일도 깎아 먹었다. 마치 초저녁처럼. 장기 여행 중에서 어느덧 우리들에게 정착된 생활 패턴이다. 그동안의 체험으로 자리 잡아 가는 나의 여행에 대한 행동 방식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하면 현실과의 단절 원칙을 지켜라. 가족, 업무, 사업 등과의 결별이 진정 자유, 마음의 평화, 이상 추구라는 여행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가. 여행 중에도 너무 현실에 빠져 있으면 여행이 주는 일종의 이완 상태(릴랙스)의 효험은 반감될 것이다.
둘째, 건강 유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수면 시간, 시차 적응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데 잘 적응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불필요한 외출을 통해 육체적 피로감이 누적되지 않도록 한다. 무리한 행동에 근신해야 한다. 오버드링크(과음), 화투놀이 등으로 몸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저녁에 잠이 오면 무조건 잠 들어라. 새벽 형 삶에 익숙해져야한다. 이는 또 패키지 여행단에서 출발시간을 엄수할 수 있는 요령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분은 미국 장거리 여행 중 술과 오락 등에 너무 빠져서 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나중에 명예퇴직 하는 결과를 가져온 사례도 있었다. 특히 국외 장거리 여행에서 시차, 환경의 급변 등에 우리의 심신은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분도 다소 약한 풍, 즉 뇌졸중 증세가 있어서 병원이 장기 입원하였다. 다행이 경미한 장애만 남게 되어서 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완전한 정상 회복은 되지 못한 사실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게 되었다.
셋째, 여행에 대한 기록은 즉각적으로 가능하면 철저히, 세밀히 해야 한다. 일반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 비디오카메라, 녹음기, 지도, 예비용 카메라, 필기구 등의 구비는 기본이다. 특히 기록 사항 중 중요시되는 것은 출발, 도착시간, 경유 지명, 식당 이름 및 메뉴, 가격, 거리, 건물 이름, 특별한 여행 정보, 분위기, 행인들의 표정 등이다. 복잡하고 많은 코스를 거치면서 혼동되는 점이 있으므로 사전에 세밀한 지도를 준비해서 진행 코스를 보면서 메모를 남겨야 나중에 종합 기록할 때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필기구는 부드럽고 굵은 사인펜으로 지면이 넓은 수첩에 바로, 명확히 나중에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가능한 많은 것을 기록하면 좋겠지만 자칫하면 나중에 본인도 식별이 안 될 수가 있으므로 중요한 사실 하나라도 또박또박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가이드의 안내와 설명 중에는 살아 있는 정보가 많다. 이렇게 뚜렷한 목적과 구체적인 방법을 가지고 여행을 진행하면 장거리 코치 투어에도 결코 지루한 법이 없다.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특히 차안에서 졸거나 자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내 생애에서 언제 다시 이 길을 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 동부 캐나다 퀘벡 가는 길은 나의 삶의 한 여정과도 같은 것, 다시는 와 볼 수 없는 삶의 엄숙한 일회성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록의 최종 종합적 정리는 될 수 있으면 빨리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럴 경우 흔히 지나치게 세세한 기록이 될 수도 있으므로 시간이 좀 지난 뒤 그 여행 전체를 조망하고 감상하며 회상했을 때 특별히 떠오르는 부분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부분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기록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좀 더 멋진 여행을 하려면 전문 여행기록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도 노트북컴퓨터 정도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기록을 위해서 반드시 휴대해야 할 것이다.
보는 여행에서 참여하고 체험하는 여행, 느끼고 생각하는 여행, 기록하는 여행으로 차원을 높여가야 할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사전 준비하는 여행은 필수적이다.
여행의 기록법도 단순한 사실 기록은 기본이고 대비하기, 이를 테면 동양과 서양, 한국과 미국, 미 서부와 미 동부 등, 문화 역사적 접근법, 나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한 공감대 형성하기, 나의 관심 분야 집중 탐구 및 부각, 다른 사람의 여행기와 비교하기, 주제 정해서 여행하고 그 기록 남기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기록 없는 여행은 의미 없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퀘벡(Quebec) 관광의 날, 즉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퀘벡’이란 말의 뜻은 볼 것도 없이 불어일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은 큰 오류다. 북미 대륙 거의 대부분의 지명이 인디언들이 부르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또한 간밤에 우리가 퀘벡에서 자지 않았고 트로아 리비에르라는 도시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나는 아침에 출발할 때서야 알게 되었다. 즉 우리가 엊저녁 묵은 이 ‘트로아 리비에르’ 역시 세인트로렌스 강 연안의 도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 줄기 강’이라는 불어인데 여기가 퀘벡이 아니고 퀘벡 주 남쪽 도시이며 오늘 목적지가 퀘벡이라는 사실을 출발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0.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