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다시 교육을 생각하면서/부모교육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대두되어 왔던 것이다, 이제는 학부모 교육이다 1/2

청솔고개 2020. 8. 22. 09:55

다시 교육을 생각하면서/이제는 학부모 교육이다

                                                                                         청솔고개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 상담을 통해서 그 동안 확인한 것은 그 사례별로 그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의 종류도, 정도도 각기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담의 매뉴얼 중에는 상담자와 학부모와의 면담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학부모와의 한 두 차례 두어 시간의 대화로 그 전모를 다 파악하기란 힘들지만 아이들의 어려움을 초래한 원인 중에는 아이들의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아이를 만나기에 미처 준비 안 된 부모가 그 주된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어떤 결과의 원인을 두고 전적으로 어떤 것을 꼬집어서 말하기에는 세상일은 너무 복잡다단할 것이다. 세상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경우는 부모의 양육태도가 그 원인의 일정 부분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 부모만 탓할 수는 없다. 그런 부모가 양산되도록 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날 때 백짓장 같은 아이를 부모가 맞이해서 영유아시기에서 청소년 시기까지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아이는 많이 달라진다. 최근 들어 육아에 대한 많은 정보가 교육기관, 언론, SNS 등에서 제공하고 있다. 그런 지식과 정보가 나름대로 다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내 아이한테 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극단적인 처방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자녀양육 태도에서 지나친 엄격성도, 지나친 자율성도 백짓장 같은 상태에서는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동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모교육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대두되어 왔던 것이다.

   필자가 현직 생활할 때 고민해서 정리한 부모교육에 대한 생각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 다른 데 발표했던 것을 좀 다듬어서 다시 올려본다.

   아래 글을 발표한 지가 벌써 17~8년 가까이 돼 간다. 그 때 비해서는 이제는 우리 학교현장과 관련한 학부모 교육의 현실이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이제는 학부모 교육이다  1/2

                                                                                                                              청솔고개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지식기반산업의 기반(SOC)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를 굳건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역시 교육이 앞장서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실붕괴 현상’이라면 극언인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교육정책입안자들은 온갖 특효 처방을 다하고 있지만 교육이 개선되고 있다는 말은 잘 들어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과연 우리의 교육은 지금 어떠한 형편인가? 정말 교실은 붕괴되고 있는가? 아니면 지나치고 거친 표현인가?

   이것에 대해서 극단적인 몇몇 사례만을 보고 일반화하려는 잘못된 의도라는 시각도 있지만, 대체로 교육이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인식에는 공감하리라고 본다.

   이는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 잘 알아보기 위해서는 사안을 보다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세대의 10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을 더듬어 보자. 그리고 지금의 교육적 상황과 환경을 비교해보자. 시설, 인적 자원, 법적 제도적 체제, 국가 및 사회의 교육에 대한 예산 지원, 교육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 등을 60년대와 2000년대 40년 차이를 두고 단순 비교해 보자. 쉽게 비교될 것이다. 100을 평가 기준치로 삼았을 때 현재 2000년대가 앞의 시설에서 예산 지원가지 모든 면에서 100이상이 된다는 것은 동의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좀 객관화하기 힘든 것으로는 교육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가 있다. 이것은 아마 100이하일지도 모른다.

   교육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서서 ‘교육 붕괴’란 말인가.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국가, 사회적 모든 여건은 성장하고 있는데 교육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교육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자극적․선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육도 다른 제 분야와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국민적 기대가 있는데 그런 괄목한 성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 분야와 더불어 말이다. 교육발전과 정치발전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물론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면 교육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부추기면서 보도하는 그런 식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거론한 간단한 수치로 판단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너무 문제를 확대 과장하거나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수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통계수치로 봐서는 교육은 발전하고 있다. 우선 40년 전 교사의 역량을 생각해 보자. 그동안 국가가 교사 양성과 자질 향상에 많은 투자를 해서 우리 교사들의 수준이 현격하게 향상된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날 참 어려운 시절에 모두들 교육입국을 내걸고 매진했었다. 그 중심에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육계에 투신한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문제를 인식하고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보다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 먼저 오늘날의 교육의 수혜자인 청소년들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가 무척 중요하다.

   그 한 시각은 “우리의 청소년의 미래는 어둡기 짝이 없다. 지금의 청소년들의 이런 무질서와 전도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미래를 맡길 것인가. 불안하다. 정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일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라는 지극히 비관적인 전망이다.

   다른 한 시각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자. 즉, 청소년 그들의 세계를 인정하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세대들이나 후배들이 문제가 있고 버릇이 없어서 그 집단의 장래가 걱정이 된다는 말은 2,000년 전의 고대 국가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만약에 그때의 우려대로 2,000년 동안 잘못되어 왔으면 지금은 도대체 지옥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짜게 점수를 주어도 적어도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다. 그러니 교육이 여전히 희망이고 영원한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또 다른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교육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하는 문제로 귀착할 수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고 그 철학과 명분은 항상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공통적인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부터, 교육도 역사발전의 한 축에서 그렇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로 너무 광범위한 문제를 완벽하게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는 욕심이 앞서가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힘에 부치어서 쉽게 포기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극단적인 사고는 정말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안 되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성급하게 완벽추구주의에 빠져서 이런 우(愚)를 범하여 왔다.

   다시 학교의 교육문제로 돌아오자.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 한꺼번에 해결해야 할 산적한 교육 문제의 대부분을 학교교육에서 무리하게 떠맡고 있지나 않았는지. 그 허약한 어깨에 교육의 무게로 너무 짓누르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백화점식 교육정책이다. 하부업무(下部業務)들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백화점식으로 추진을 하다 보니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떠벌린다. 좋다하는 것은 총동원한다. 그나마 남은, 얼마 안 되는 교육력을 학생들의 교과지도 및 생활지도에 전력투구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이런 식으로 떠벌려도 되는가?

   학교현장을 한번 둘러보자. 우선 교무실이나 교장실 벽에 걸린 시책과 구호, 역점 사업 등을 거들떠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좀 심하게 말하면 그것들이 그냥 환경미화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 할까? 학교에서 학기말이나 신학기초가 되면 세워야하는 교육계획의 아이템이 얼마나 되는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서 그냥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지경이다. 역점사업이다 중점사업이다 특색사업이다, 무슨 무슨 운동, 무슨 무슨 하기, 무슨 무슨 안 하기 등등 도대체 학교는 만능인가? 좀 더 문제를 단순화해서 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복잡하면 헛갈린다.

   학교에서는 법에 따른 교육과정만 수립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교육과정 속에 교육계획이 들어 있고 그 연간 교육계획은 종횡으로 교과와 각부서로 얽어져서 추진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학교에서 가장 역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바로 매시간 분초를 다투는 수업이다. 그런데 생각하기를 모두들 수업은 소위 ‘굳짜배기’고 특색사업이니 뭐니 하는 것을 많이 떠벌려야 무슨 새로운 교육이나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참으로 이런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니 학부모도 학교를 마치 만능을 행하는 마술사쯤 생각할 밖에. 교사들도 인간이다. 결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는데 만능이 아닌 집단이 만능을 행하는 것처럼 선전하고 다닌다. 그러니 학부모들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심지어 불필요한 참견까지 해서 가뜩이나 허약한 교육력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 교육부-시도교육청-지역교육청에서 홍보용으로 제공되는 많은 교육시책들이 교사들을 옥죄고 있다. 마치 갈(葛) 덩굴이나 등(藤)줄기처럼 갈등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교사는 교단에 서면 바로 교육의 시작이다. 바로 된 교사라면 교단을 우습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업무경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들 학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한 몸에 기대를 받는 것이 때로는 주목의 존재라서 기분 좋을 때도 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다. 진정이든 가식이든 간에 국가도 학부모도 사회도 학교에 지나친 기대를 하니 학교가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 다음 2/2편이 이어짐]

                                                                    2020.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