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그날, 한 이별(離別)의 기록 2/한 삶이 태어나고 살면서 한 생애를 마감하는 일은 이리도 장엄한 것인가

청솔고개 2020. 8. 22. 23:43

그날, 한 이별(離別)의 기록 2

                                                                                        청솔고개

   여전히 37도, 38도 오르내리는 염천이다. 요즘은 밤에도 너무 더워 잠들기가 힘든다. 온몸에 땀띠가 나고 파김치가 된다.

   할아버지 장례식 날이다.

   오늘 드디어 할아버지가 영영 떠나시는 날. 그래서 영결종천(永訣終天)이라 했던가. 몇 십 년 만의 가뭄과 폭염에 야산의 나무, 특히 대나무가 허옇게 말라 죽은 사태가 속출하는 날씨다. 가뜩이나 이런 날씨인데 장례 절차가 두서없고 시행착오가 이어진다.

   오전 10시 출상을 앞두고 새벽에 종조모님 주선으로 스님 한 분을 모셔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강심 그 자리에 가서 불교식 반혼(返魂)의 식을 치렀다. 새벽 5시, 미명이 비치는 강물은 무심히 흘러가고 흥건히 맺힌 아침 이슬은 외려 포근하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사막과도 같은 이 염천의 계절에 광야와 같은 마른 땅에서 팔십오 년의 지친 혼백(魂帛)을 모셔오는 독경 소리, 요령 흔드는 소리가 새벽 강물을 따라 조용히 흘러간다. 내 가슴이 저려온다. “혼백께서는 기꺼이 흠향(歆饗)하시고 이 손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소서.”하고 속으로 나직이 되뇐다. 안개가 걷히고 이슬이 말라갈 즈음, 나는 할아버지의 혼령을 가슴에 안위하여 모셔왔다. 집에 와서는 “이제 집에 오셨으니 평안히 쉬십시오.” 또 속으로 혼령께 말씀드린다.

   “내가 이래 느그들 대접 받으니 기분은 좋다만, 어째 늘 미안타. 요쯤해서 내 가면 딱 좋으련만…….” 할아버지의 생신날이나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 생신 등 행사 때에는 일부러 바람 쐐 드린다고 좀 떨어진 바닷가 횟집 같은 데에 모시고 가서 식사 대접해 드리면 자주 하시곤 하던 말씀이었다.

   오전 10시가 출상예정이었지만 너무 더워서 좀 당기기로 하고 서둘렀다. 고향 마을 농사일 거느리면서 대대손손 기거하던 옛집은 개발독재시절에 고속도로변 정화사업이란 미명하에 강제 철거되다시피 하고 난 뒤, 시내 아들 며느리와 합가해서 사신 지 17년 된 그 집 대문 앞에서 아침 9시 20분 쯤 상여가 출발했다.

   이제 꽃상여에 누워계시는 할아버지. 숙부님께서는 상여 귀퉁이를 부여잡고 관을 끌어안으면서 오열과 대성통곡을 번갈아 반복하신다.

   “그래 맘껏 오열하세요. 이승에서는 마지막 유형의 모습이니 애달프다 어찌하리오.” 속으로 나직이 말씀 드려본다. 30분쯤 먼저 영결하고 노제를 지낸 후 장지로 향했다. 나는 맨 앞에서 내 차로 할아버님의 영정(影幀)과 명정(銘旌)을 싣고 선도했다. 영정은 바로 밑 동생이 호송하고 명정은 맏종제가 호송했다.

   장지에 도착하니 벌써 상두꾼들과 포클레인 팀 등 사전 준비 팀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박화채와 캔 맥주, 미역오이냉채 등으로 갈증을 해소해 가면서 불볕 염천 더위에도 매장 철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절친 몇몇이 이 더위에 장지까지 와 주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점심 전 하관이냐, 후 하관이냐 하고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점심 후로 하관하기로 결정 했다. 너무 더워서 갈증 해소하러 내가 캔 맥주 10개는 마신 것 같다. 이런 날씨에는 이상하게 화채 등은 암만 먹어도 갈증이 해소 안 되는데 캔 맥주 음주하고 나니 희한하게 갈증이 가시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장례식 전에 곁에서 누가 이런 사실을 일러 준 것 같았다.

   드디어 하관. 오동나무 관을 덮은 칠성판 위에는 “月城*公之柩”라 선명히 쓰여 있다. 할아버지는 9년 전 한 겨울에 가신 할머니 옆에 묻히셨다.

   나는 땀인지, 눈물인지, 술기운인지 범벅이 되어 눈앞으로 흘러내린다. 한 삽 두 삽 관이 흙에 덮어지자 숙부님께서는 또 오열하신다. 막내아들이라서 누구보다도 생전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신 숙부님이시다.

   이후 봉분을 모으고 다지고 정지하고 잔디 심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상석 놓고 망두석 세우고 나니 저녁 7시 가까이 되었다.

   아버지는 큰일이 끝나갈 무렵, 천붕지통(天崩之痛)의 허망한 기분을 못 이겨 맥주, 소주를  통음하신 나머지 언동이 좀 과하신 것 같았다. 내가 옆에서 가볍게 제지하고 호송해 드렸다.

   어둑어둑해서야 혼상(魂箱)을 모시고 귀가한 후 반혼제(返魂祭)를 올렸다.

   할아버지를 묻고 난 첫날 저녁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 듯 비바람이 몰아치어 촉촉이 대지를 적셨다. 실로 몇 달 만의 비 구경이었다. 이 가뭄에 기적처럼.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혹여 밤새 폭우라도 내리면 아직 굳지 않은 봉분이 유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은 잠이 어떻게 들었는지 비몽사몽, 취생몽사 혼동 그 자체다. 나도 흠뻑 취해 아버지처럼 목 놓아 울고 싶은 심경이었다.

   우리의 첫째 둘째로 망인의 증손녀, 증손자는 그 더운 날씨에도 종일 묘소 조성하는 근처에서 천진하게 뛰 놀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어린 뇌리와 눈망울에는 먼 훗날 오늘의 생생한 모습이 그날의 기억으로 각인돼 있으리다.

   한 삶이 태어나고 살면서 한 생애를 마감하는 일은 이리도 장엄한 것인가.

[위의 기록은 1994년 여름 할아버지 장례식 그날, 내 생애 기록 중 일부를 조금 꾸민 것임]

                                                          2020.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