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숲을 예찬함(1/2)/입 속까지 파고드는 등나무 새순들의 진한 풋내가 좋다

청솔고개 2020. 9. 2. 12:40

숲을 예찬함(1/2)

 

                                                                청솔고개

 

   모처럼 비가 온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단비, 감로수(甘露水)다. 단비를 머금으면서 그동안 메말랐던 나무들이 그 생명력의 절정에서 하강 곡선을 이루는 이 절기이지만 새로운 생기를 자랑한다. 이럴 때는 정말 생명력의 충일(充溢), 그 자체를 바라보는 듯하다.

   이래서 나는 이렇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옴직한 장면이기도 한데, 맨발에 온 몸은 젖어 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산발하다시피 하고 두 눈은 광기(狂氣)에 번득이고 빗물과 땀에 젖은 허리춤은 다 드러나 보이면서 거리를 헤매는 비련(悲戀)의 여인 같은 이미지 그려보기다. 나는 이런 극 중 여인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심리적 쾌감, 즉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낀다.

   나도 한 번 그래 보고 싶다. 물론 빗물에 젖어 달라붙은 선정적, 관능적인 차림에서도 다소간 자극을 받겠지만, 그보다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보다 더 원초적인 생명력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빗물은 생명력이다. 더군다나 뿌리가 얕고 잎이 넓어서 더 깊은 곳에서 물기를 길어 올리지 못하고, 잎사귀의 표면을 움츠려서 물기의 증발을 억제하지 못하는 낙엽교목들은, 한 달만 가물어도 벌써 잎사귀뿐만 아니라 줄기까지 윤기를 잃고 까칠한 모습이 된다. 우리 집의 나무들이 그동안 그런 갈증에 시달렸었다.

   이런 나무들이 이제 그 비련(悲戀)의 여인처럼 비를 맞고 서 있다. 한 뼘밖에 안 되는 우리 집 뜰과 담벼락, 대문간에도 그동안 저절로 제대로 나무와 풀들이 흠뻑 생명수를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좋아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괜히 마음이 설레면서 생명의 빗소리를 듣는다.

   갓난아이 때, 우리 집에 입양(入養)되어 그동안 18년이란 짧지 않는 동안 애환(哀歡)을 같이하며 지내고 있어 누구보다도 정겨운 한 식구가 되어버린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좁은 집 안에서 고생스럽게 살아왔지만 불평 한 마디하지 않고 잘, 그리고 제대로 자라준 라일락, 목련, 감나무, 살구나무, 키 큰 영산홍, 대추나무, 등나무넝쿨, 줄 장미, 사철장미, 동백, 담쟁이, 사철 잔디 등 제법 대가족이다.

   아내는 이런 식구들이 때로는 너무 성가시게 구니까 어찌 좀 처리해 보라고 볼멘소리로 주문한다. 이를테면 등나무 넝쿨이 너무 웃자라서 이층 계단을 막아버린다든지, 담쟁이의 왕성한 번식력이 대문입구를 온통 막아 버려서 걸리적거린다든지, 단감나무는 몇 년 째, 흰 깍지벌레로 흰 깍지병인가 뭔가에 옮아서 9월도 다 가기 전에 거지반 다 낙과(落果)해서 거품을 내면서 곪아터진 풋감이 온 마당에 특유의 진갈색 칠을 해대어서 그런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나직이 타이르기를 “이 숲의 깊은 그늘만으로 만족하시오, 숲이 주는 그윽하고 시원함, 아늑하고 쾌적함만 맛보았으면 되었지, 어찌 열매의 달콤함까지 맛보려하시오. 그대여, 욕심이 과하시구려, 탐욕을 좀 줄이시오!” 하고 능청을 떤다.

   그렇다. 우리는 자연에 기대어 자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봄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과 그 새잎과 다투어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 웃음 짓는 꽃들의 교태(嬌態), 여름의 심해(深海) 같은 녹음, 가을의 현란하고 환상적이며 아주 동화적이기까지 한 단풍과 달콤한 결실의 포만감, 겨울이면 모든 걸 벗어던지고 기꺼이 스스로 나목이 되어 바람의 친구로, 혹은 명상과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는 등 이만하면 족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꽃잎은 가을의 엄정한 결실을 위해 떨어져야한다. 그래서 땅에서 짓밟히거나 바람에 흩날릴 때, 혹은 겨울 초입에 잎들은 제 소임을 다 한 후,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장엄한 장례의 행렬을 치를라치면, 사람들은 그러한 자연에서 한 수 배울 생각보다는 온갖 객쩍은 소리들을 다 해댄다. 꽃잎이 짓밟혀서 짓이겨 지거나 낙엽이 져서 산지사방으로 어지럽게 뒹굴면 그냥 보고 있지 못한다. 거기서 자연의 섭리나 삶의 지혜 하나라도 찾으려 하지는 않고, ‘지저분하다, 잘라버려라, 베어버려라, 태워버려라, 묻어버려라’ 하고 아우성이니 말이다. 너무나 인간 중심이다.

   이렇게 인간들이 걱정하거나 간섭하지 않아도 자연은 '아름다운 썩음'을 진행한다. 풍화되어 간다. 제가 태어난 뿌리를 북돋워주기 위해서다.

   대체로 인간의 욕심은 이런 법이다.

   우리 집 이층은 증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층 올라가는 계단이 대문간 옥상으로 경사진 디귿자 모양이다. 대문간 옥상으로 올린 등나무, 줄 장미, 담쟁이가 쑥쑥 자라난다. 특히 등나무는 콩과식물로 그 왕성한 생장력이 가히 식물 중에 으뜸이라 할 만한데, 한 사나흘만 쳐주지 않으면 통로가 막힐 지경이다. 이때 우리 식구들이 이층으로 올라가려면 마치 밀림을 헤치어 나가는 기분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이게 좋다. 코끝 아니 입 속까지 파고드는 등나무 새순들의 진한 풋내가 좋다.

   이 세상에서 누가 나보다도 자연을 이처럼 더 가까이 하면서 살고 있을까 하고 속으로 자랑해 본다. 햇볕에 타들어가는 흙내에다 온 콩밭고랑을 뒤덮어 버리는 쇠비름, 바랭이, 울타리나 밭둑 돌무더기를 휘감아 퍼져나가는 뜯게덤불이 콩 ⁰대궁이와 어우러져 풍기는 싸아한 풀 내의 진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그때, 한여름 ¹땍볕 아래 산야를 뛰어다니던 아득한 유년 시절, 나는 늘 알 수 없는 갈증에 목말라했었다.

[이 글은 2001년 초가을에 쓴 것을 다시 정리한 것임. 다음에 2/2편이 이어짐]

                                                                              2020. 9. 2.

 

[주(注)]

⁰대궁이 : ‘대’의 토박이 말

¹땍볕 : ‘뙤약볕’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