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하루에 거의 한 두 번씩 바다를 마주한다. 젊은 날에는 그리 간절하게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어느 바닷가에서 그 안개와 파도를 이웃하며 평생 바다를 바라보면서 살고 싶었을 때도 있었다. 20대에는 특히 겨울바다를 좋아했고, 그 겨울바다의 등대지기는 낭만과 고독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 후 나이가 들어서 한 때는 원색의 열대 야생화들이 열정적으로 피어나는 열대의 해변을 꿈꾸기도 했었다. 고갱의 타이티, 영화 남태평양을 통해서 그 환상은 더욱 강렬해졌다.
20대에는 나의 사고와 감성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가요, 음악, 그 외 소설이나 시 등 문학, 영화 등을 통하여 바다에 대한 환상과 꿈을 키워나갔었다. 바다에 대한 상념과 환상은 나의 정신세계의 지평을 아주 많이 확산시켜 주었었다. 바다는 미지의 세계이고 가능성의 세계였으며 심지어 구원의 세계이기도 하였다. 특히 육사의 ‘청포도’의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에서부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 등 문학 작품을 통하여 바다에 대한 상상과 로망은 더 커져갔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에서의 바다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가장 절정으로 치달았다.
요즘 기회가 돼서 거의 2주 째 매일 바다를 보고 있지만 이제는 나도 바다를 대하는 시각이 달라진 것 같다. 젊은 시절의 바다에 품었던 그 강렬한 환상과 로망은 나에게 점점 사라져서 희미해진다. 좀 안타깝다. 이게 바로 나이 들어감의 증좌가 아닐까 싶다.
나이 듦의 가장 큰 특징으로 삶과 생활에서 내 가슴 뛰게 하는 그 무엇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 우리가 영아에서 유년으로 자라날 때는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매일매일 새롭다. 엄마아빠가 귀찮을 정도로 묻는다. 우리의 눈은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이고 우리의 가슴은 쿵쾅거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유년에서 소년으로 성장, 소년에서 청년, 청년에서 그 이후의 시기로 진행될수록 우리는 대개 점점 이 보석 같은 것을 잃어가거나 잊어가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 있음이 무엇인가? 인생이란 긴 여행코스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새롭고 경이로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젠가부터 그런 새로움, 경이로움에 둔감해진다. 참 슬픈 일이다. 그러니 무기력하고 우울하며, 삶의 의의마저 되찾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 삶이란 여정에 다소 싫증이 나면 공간 이동 여정으로 다가간다. 수많은 선인들이 그렇게 추구하여 마지않았던 숱한 여행길에 대한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난 이제 지난날 나의 가슴을 그렇게 뛰게 하고 들끓게 했던 바다에 대한 흥미와 감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쓸쓸하다. 이러다가는 나의 모든 감성과 아름다운 기억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20대 중반, 내가 주선한 여름의 한 여행 길. 남해도 어느 해수욕장의 텐트에서 밤새 파도가 달빛에 부서져 은파(銀波)를 짓는 것을 보았었다. 그 은파를 보고 은파란 노래를 불러주던 동행한 한 추억이 회상된다. 평생 좀 서늘해지는 늦여름만 되면 그 바닷가 밤바람의 서늘함이 상기된다. 일행 모두가 멋모르고 들어갔던 바다에서 해파리에 물려서 온 몸이 부어올랐어도 그 바다의 은파 파도 소리와 한 동행의 은파곡조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월 어느 날, 내가 주선한 동해변에서 하룻밤 묵고 바닷가 걷기 여행의 그곳이 바로 지금의 여기. 이제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그때의 발길이 닿던 곳도, 쉬었던 곳도 기억이 안 된다. 다만 다음날 이 바닷가 해안을 하염없이 걸었었던 기억만 있다. 그 때 역시, 동행한 한 추억이 나에게 “그 순간순간 표출된 불안한 눈매”라고 마지막 편지에다 지적했던 충격의 기억만 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저런 것도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오늘 밤 자고 나서 내일 다시 보는 바다가 어제의 바다와는 다른 정말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면, 매일매일 그렇게 된다면, 내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나는 소년의 가슴으로 살게 될 것이다. 2020.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