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가을날의 동화 8, 우리를 슬프게 하는 축제의 뒤끝/무지개를 좇다 놓쳐버린 악동처럼 애잔한 마음이 더하여져서 그때 운동장 한 구석에서 정말로 한번은 크게 울어버렸던 기억

청솔고개 2020. 9. 20. 12:13

가을날의 동화 7, 우리를 슬프게 하는 축제의 뒤끝

                                                                           청솔고개

 

   가을이 깊어간다.

   이즈음에는 반드시 가을 운동회가 열린다. 당시 학교 운동회는 곧 마을 축제다. 우리 학교에서 운동회 하면 같은 면의 골짜기 안쪽 두 학교에서도 한두 시간 수업만 하고 아이들이 막 몰려온다. 구경도 하고 동네 대항 경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응원도 해야 한다는 명분이다. 이래서 근처 마을뿐만 아니라 온 면의 축제로 발전 된다. 이웃 학교에 운동회 때문에 수업을 조정할 수 있었던 그 때의 일상에는 느림의 미학, 유연성과 자유로움, 여유 등이 넘쳐나고 있었다.

   운동회 전 과정이 아련히 떠오른다. 사전 연습과 준비, 당일 축제의 열기, 끝 난 후 허망함과 쓸쓸함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련히 남아 있다. 축제는 끝났다. 키 큰 연분홍, 진분홍 코스모스가 운동장 가에서 운동회 참가한 군중들에 의해 짓밟혀 부러져 있거나 넘어져 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이러면 어린 것에도 마음이 아파 온다. 무언가 내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요즘 주유소에 가끔 걸린 만국기를 보아도, 머리띠 맨 사람을 보아도 그 때가 떠오른다. 그 때 기분은 매우 절실했다.

청군, 백군을 상징하는 푸른 색, 흰색 머리띠는 집에서 엄마가 바늘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기워서 만들어 주셨던 기억도 있다. 우리가 머리띠를 매는 그 시간에는 하나하나 한 집단의 작은 대표 선수요 영웅이 되는 기분이 든다. 꽉 조여 매는 머리띠는 어린 우리로도 하여금 그런 결기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작용을 하는 것을 다 커서야 알았다. 특히 이어달리기, 기마전에 임하면 그 결기는 더욱 전투적으로 된다. 깜장 팬티, 하얀 러닝셔츠로 복장을 갖춘 전교생의 체조와 유희는 마치 까치 떼들이 함께 날아올랐다 내렸다하는 군무나 펭귄의 이동이 연상된다.

   다음은 지난  2009년 가을에 내가 마련한 대학 동기들과의 내 고향에서의 모임 뒤의 나의 기분을 동기 카페에 올린 글이다. 이 기분이 꼭 그 어린 때의 이어짐 같아서 다시 옮겨 본다. 그 모임은 평생의 내 고향으로의 초대라서 더욱 애틋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친구들이여!

   지금 무엇 때문인지 옛 국민 학교시절이 생각납니다. 가을 운동회가 끝난 뒤 느끼는 기분이 2주 넘게 계속됩니다. 이게 혹시 내가 가끔 앓던 우울증의 단초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키 큰 코스모스 하늘거리던 날 운동장 가득했던 사람들은 다 돌아가 버린, 텅 빈 운동장, 운동회 뒷마당을 바라보았던 시절. 근 한 달 동안, 깜장고무신에 까만 팬티, 흰 러닝셔츠를 입고 매일매일 해가 져서 어둠살이 내릴 때까지 체조연습으로 얼굴도 까맣게 탔고, 그렇게 연습해서 운집한 마을 사람들한테 확성기,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신나고 자랑스레 율동과 무용을 자랑했던 시절. 지금 생각하니 난 그때도 영락없는 토종 순종 촌놈이었었지요. 엄마와 함께 먹었던 고구마와 밤 껍질은 어지럽게 버려져 있고 그 자리엔 쓸쓸함과 허망함만 고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난 그 자리에 만국기는 찢겨 바람에 펄럭거리고, 코스모스는 짓밟혀 허리가 꺾이어진 채로 누워 있고, 겨우 서 있다는 것은 가을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마저 휙 불어드는 돌개바람에 힘없이 엎어지고. 그 모습에 난 눈물이 막 나더군요. ‘모두들 어디 갔나, 모두들 어디 갔나?’ 하면서 절규하는 노래 가사 한 구절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머슴애는 눈물을 쉬 흘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눈물을 참느라고 죽을 뻔했었습니다. 그 때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밉고 못난 내 얼굴이란! 축제의 뒤끝처럼 허허한 마음에다 무지개를 좇다 놓쳐버린 악동처럼 애잔한 마음이 더하여져서 그때 운동장 한 구석에서 정말로 한번은 크게 울어버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이 그런 기분입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거기에 ‘휴가의 마지막 날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하는 것을 절감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유독 외로움을 잘 타고 숫기 없는 나로서는 반백년이 다 지나서 치른 이번 가을 운동회, 이 ‘축제?’의 뒤끝도 참 애잔하였습니다.~[후략]”

                                                        2020.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