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가을날의 동화 9, 메뚜기 잡기/해지는 줄 모르고 두 번씩이나 논가를 맴돌았다

청솔고개 2020. 11. 1. 10:40

가을날의 동화 9, 메뚜기 잡기

                                                             청솔고개

   이제 10월도 끝나갈 무렵이다.

   며칠 전 아내와 같이 근처 시골 장날에 장터를 다녀오다가 아직 벼를 안 벤 논이 있어서 잠시 들어가 보았다. 해가 다 져가니 혹시 올해 처음으로 메뚜기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내가 참 즐겨하는 메뚜기 잡기다. 더구나 올해는 9월을 중심으로 세 차례 큰 태풍으로 메뚜기가 다 날아가 버려서 한 마리도 없다는 이야기가 정말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시장에 메뚜기를 파는 곳이 한 군데도 없으니 그게 사실일 거라고 아내가 말한다.

   그간 우리의 메뚜기 잡기 경험에 따르면 메뚜기는 이른 새벽이나 아니면 해 진 후 기온이 좀 떨어진 후라야 잘 잡힌다. 왜냐하면 이들은 저온에서는 활동성이 무척 약해지기 때문에 잡는 사람이 조금만 집중해서 집어서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한낮에는 이놈들이 얼마나 날랜지 마치 데워진 솥에 튀어 오르는 콩알 같은 민첩성을 보인다. 이때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메뚜기의 생태를 좀 알고부터는 새벽잠을 설치면서 나섰다. 아직 벼 포기에는 밤새 담뿍 내려앉은 찬 이슬이 내려 앉아 마치 흥건한 빗물 같다. 그 때문에 바지와 소매가 다 젖어버린다. 그러다보면 메뚜기 잡는 것보다 옷이 먼저 젖어 한기가 든다. 그렇게 용을 쓰다보면 얼마 안 가서 해가 뜬다. 아침 햇살이 데워지는 데는 한 시간 정도, 이때 풀잎 끝의 이슬은 일제히 마르기 시작한다. 그러니 ‘초로(草露) 같은 인생’이란 말이 생긴 듯하다. 메뚜기를 비교적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건 이렇게 해 뜨기 전, 해 진 후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다. 햇살이 달면 메뚜기의 세상이 된다. 그 활동성 최고조로 사방팔방 막 튄다. 그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어 마치 럭비공 같다고나 할까.

   이런 일을 겪고부터는 새벽 메뚜기 잡으려면 랜턴 준비에다 우의를 걸치고 장화까지 신고 나서야 함을 알았다. 이즈음 가끔 한낮에 강변이나 논둑길로 걸어가거나 자전거로 달려가 보면, 그때마다 벌써 누르스름해져 가는 무성한 풀 더미에서 길가로 볕을 쬐러 나와서 잔뜩 붙어 있던 메뚜기들이 놀라서 안으로 달아나는데 마치 바짝 단 솥바닥의 콩알들 같다.

   올해 태풍이 과연 메뚜기를 다 거두어 갔을까? 조심스레 논 가장자리로 접근해 본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마치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모습을 한, 붙어 있는 암수 한 쌍이 보인다. 등에 붙어 있는 놈은 확실히 덩치가 작다. 아내의 눈길이 이를 포착, 손길은 날렵하게 한 쌍을 챈다. 올 최초의 메뚜기손맛이라고 공치사해 줬다. 아내는 늘 이런 식으로 잘 채포하는데 나는 영 서투르다.

   이놈들이 아주 누래져 가는 볏잎과 똑같은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쉽게 구분이 안 된다. 찾는 눈도 밝아야 하고 조용히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드디어 나도 한 마리 보았다. 그런데 내 발자국 소리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이놈이 먼저 알아차리고 그냥 아래로 툭 죽은 듯이 떨어져 나자빠진다. 그냥 도토리 알 떨어지듯 해서 벼 밑동 뒤나 그 사이로 숨어버린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근처를 살펴보고 만져 봐도 행방이 묘연하다. 자취가 없다. 이놈들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생존 방어능력을 타고 난 것이다. 보호색으로 띤 위장술이 감쪽같다. 일단 처음 채포를 놓쳐버리면 포기해야 한다. 두세 번 푹푹 뛰어 다른 데로 옮겨 가는 경우도 다시 채포하는 것은 어림없다. 360도 전 방위 어디로 튈 것인가 그 방향성을 예측하고 내 손안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 나는 세 번이나 튀어 도망한 한 쌍을 채포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야말로 소발의 쥐잡기 식이다. 모처럼 메뚜기 손맛 봤다고 호들갑을 떤다.

   메뚜기 잡기에 해지는 줄 모르고 두 번씩이나 논가를 맴돌았다. 등짝에 짝을 업고 있는 메뚜기를 잡으려니 어쩐지 미안하다고 한다. 그래도 그 재미에 해지는 줄도 모른다.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늦가을의 해는 짧기만 하다.

   문득 60년도 더 전 일이다.

   퍼런 유리 댓병을 들고 고향 외말 맞도랑 건너기 전, 닥밭밑 끝의 한 논에 메뚜기 잡으러 들어간 아이가 있었다.  무논에 발이 빠지고 중심을 잃는 바람에 넘어져서 메뚜기는 몇 마리 잡지도 못하고 집안 어른들이 아끼는 댓병만 깨뜨려버렸다. 메뚜기들은 슬금슬금 하더니 다 튀어 도망쳐버린다. 너무 놀라서 제김에 "으앙" 하고 울음보 터뜨리고 말았다. 그 때 옆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던 이웃 어른 한 분이 그 울음보를 듣고 “이게 누고? 아무개뜨기 손자아이가? 안 다쳤나? 그러머 고마 개안테이…….” 하고 와서 달래준다. 울음은 그쳤다. 그 아이는 메뚜기도 못 잡고 병도 깨뜨리고 아장아장 집으로 돌아간다.

   그 아이가 이제 여기서 다시 메뚜기를 잡으면서 짝에게 그때 병 깬 이야길 해준다.

   그날 아침도 오늘처럼 하늘이 옥빛이었다. 햇살이 참 달고 기름져보였다. 내 의식 속에서의 가장 평화로운 색은 옅은 노랑과 갈색의 신묘한 조합 같은 볏잎 색깔이다. 그 볏잎 색깔이 온 들에 환히 퍼져 있다. 옥빛 하늘, 기름진 가을 양광과 환상의 어울림이 펼쳐지는 이 계절이다. 초봄이나 초가을의 연두색 다음으로 좋아하는 색이다.

   그때 그 아이를 달래주었던 그분이 참 고맙다.

   해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다.

   메뚜기를 반찬으로 해 먹는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잡은 메뚜기는 모아서 솥에다 살짝 찐다. 날개와 다리를 떼고 햇볕에 말린다. 간장, 들기름 등 알맞게 넣어서 살짝 볶는다. 바싹바싹 씹는 맛,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소중한 친구나 귀한 손님 오면 안주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내가 자꾸 그 맛을 추켜세우니 아내는 올해도 몇 마리 안 되는 그것을 다듬는다고 분주하다. 그러면서 해마다 하는 말, 이 때문에 손가락 끝이 다 더러워졌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밖으로, 들로 나가면 눈길과 손길은 자꾸 벼논으로 향한다.

                                                            2020. 10. 31.

[주(注)]

댓병: '됫병(한 되를 담을 수 있는 크기의 병)'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