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길 위의 가을날들 3/~단양, 진부, 평창, 영월, 오대산, 적멸보궁, 비로봉, 정선, 태백, 봉화, 영양~새벽어둠에 불빛 하나 그립고 차디찬 비 기운 뼛속을 스미는데

청솔고개 2020. 11. 1. 14:10

길 위의 가을날들 3/오대산 비로봉

                                                                                  청솔고개

 

   가을빛이 산야 강산을 아득히 덮고 있었다. 군위-단양 중앙고속 달리면서 메말라서 더욱 빛바래진 떡갈나무의 잎, 굴참나무, 참나무 숲, 진분홍색애기단풍, 낙엽송의 기품 있는 자태, 그들의 귀공자 같은 이국풍모, 알록달록 노랑 잎을 덩달아 자랑하고 있다.

   단양-진부 국도59호, 31번국도, 해는 어스름 기운을 번지게 하는데 일기예보대로 추일 황혼의 서정이 단양, 평창 산골길에 번진다. 길가 샛노란 은행잎은 앙증맞은 애기 손 같은 귀여움과 황홀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단풍나무, 느티나무, 애기 단풍의 스펙트럼. 휘익 가을바람 한 떨기에 현란한 손짓을 자랑한다.

   빗발이 후드득, 가을비에 젖은 강원도 중서부 국도, 강물 따라 구름도 흐르고 빗길도 따라온다. 평창 지나 영월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비 맞으면서 녹차 한 잔 하면서 나그네의 객수를 달래본다. 비오는 10월 마지막 날 강원도 가는 길, 오대산 성지 순례길, 내 마음의 먼지를 이 가을바람에 흩날려버리고 이 가을비에 씻어버리면 그 언젠가 1월 가을 강원도 산길 솔잎 위의 눈 더미, 떡갈잎에 묻은 눈송이, 파아란 하늘, 빛나는 태양 그 광휘……. 저무는 늦가을 강원도의 모습이 경이롭다.

   산 아래 숙소에서 21:30 취침. [2009. 10. 31. 토. 비]

 

   새벽 2시 반쯤 잠이 깨서 잠을 설치다가 TV채널 이리저리 돌려본다. 밖에는 칠흑 같은 어둠, 빗소리가 밤의 정적을 깬다. 새벽, 11월 초하루 나그네의 객창감이 저 빗소리로 더욱 친하게 느껴진다. 이 산골의 새벽, 나그네의 심회는 더욱 쓸쓸해진다. 더욱 더. 참으로 모처럼 느껴보는 달콤한 고독이었다.

   새벽이다. 비가 계속 추적추적 내린다.

   05:50. 막 숙소의 짐을 차에 옮겼다. 아직 밖은 짙은 어둠. 계단에 불이 없어 위험하다. 온수 나오지 않은 것과 같이 조명 불편함도 헐값의 숙박비 때문인가. 이제 곧 출발이다. 찬비가 내린다. 겨울비 같다. 이제 적멸보궁을 지나 비로봉에 이른다. 모두들 불(佛) 세계의 높은 경지를 의미한다. 대단한 차원이다.

 

   객창에 빗소리 들리니

   여기는 오대를 모신 적멸의 그 허무.

   새벽어둠에 불빛 하나 그립고

   차디찬 비 기운 뼛속을 스미는데

   잠 못 들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나그네 심회

   가을바람 가을 잎에 길거리 스산한데

   파스텔화 부드러운 손길 감싸 안개로 번져나고

 

   이런 늦가을 날에 비만 뿌리면 72년도 유신선포 해, 단짝 친구와 동해북부선을 타고 북평, 강릉 침엽수림이 우거진 산록을 느릿느릿 여행하던 그해 가을이 생각난다. 강릉 경포대에는 기념품 파는 상점 몇몇만 문이 열려 있었다. 묘령의 점원이 보내는 다스한 눈길만 오로지 우리를 위로해 줄 뿐. 내 몸은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병이 들어 지쳐있었고, 마음은 계속 가을비 우산 속으로만 파고드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던 그 순간. 내 생애의 고독하고 처절했던 단애. 깊이도 모를 단층 같은 적이 있었다. 대학 2년생, 이제 내 나이 스물한 살. 흐릿한 수평선에 강릉 앞바다 오리섬마저 아득해 보이는데 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 했으며 고독해 했으며 절망했던가. 그 나이에. 단풍은 가을비에 젖었었고 석탄을 운반하는 화물 삼판용 차는 주야로 태백준령을 숨차게 넘는데.

   적멸보궁을 지나 비로봉 정상에 오르니 여긴 이미 한겨울, 손이 시리고 바람이 차다. 마른 잎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빗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능선, 이제 돌아가야지. 그냥 ⁰놋날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하산하다. 춥다. 오늘이 11월 초하루, 이때 내 몸이 이렇게까지 추운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많은 변화가 내 몸에서 일어나나 보다. 손이 정말 시리다. 우의도 쓸데없다. 몸도 마음도 의지 가지할 데 없다.

   귀로. 이렇게까지 황황히 이곳을 떠나는 게 아닌데, 많은 아쉬움이 가슴을 저민다. 언제 다시 이 만추에 동행과 함께 동행 할 것인가. 만추의 월정사, 상원사의 맨얼굴 상호를 뵙지 못하고 떠나서 무척 아쉬웠다. 전나무 숲이 여전히 좋고 아름답고 싱그러운 데 말이다. 봄날 새파란 청쑥 같은 전나무 길과 숲. 그냥 걸어도 좋은데. 그러나 좀은 미련을 남기고 떠나는 게 옳을 것 같다. 아쉬움과 다소간의 미진함은 다음날을 기약할 수 있는 단서가 되니까.

   대신 가을비에 곱게 씻긴 백두대간의 언저리, 청솔에서 진홍까지 단풍의 스펙트럼을 싫도록 즐길 수 있지 않았는가. 때로는 살짝 개서 마알간 얼굴은 자랑하는 가을 하늘이란 추수(秋水) 그 맨얼굴.

   태백을 지나면서이다. 봉화, 영양 방향을 찾지 못해서 맴돌다가 그냥 31번 국도로 지나갔다. 한참가다 보니 아파트 마을 지나는 도로가 자꾸 좁아진다. 안개 짙어진다. 안개 속에 묻힌 가로수가 정겹다. 백두대간 탐방로 초입이라고 안내판에 내 눈이 확 뜨인다. 반갑고 기대가 된다. 언젠가 나도 이 백두대간 종주를, 내 마지막 꿈을……. [2009. 11. 1. 비]

                                                                     2020. 11. 1.

 

[주(注)]

⁰놋날같이 : ‘노드리듯’의 다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