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길 위의 가을날들 4/~구미, 선산, 속리산, 세심정, 무을면~무을 들녘, 거의 추수가 다 끝난 들판은 늦가을의 쓸쓸함과 호젓함이 함께 내려 앉아 있었다
청솔고개
2020. 11. 3. 21:36
길 위의 가을날들 4/속리산, 세심정, 무을 들녘
청솔고개
아침 8시 30분 조금 지나 아내와 같이 속리산으로 출발했다. 아내는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이라서 좀 들뜬 기분이다. 얼굴과 볼도 상기되었다. 그런 아내가 좋다. 엊저녁에도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잠마저 설칠 지경이었다. 옛 친구들, 그 옛날, 우리들의 청소년 시절, 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다. 아직은 포근한 늦가을 아침이다. 가을이 부드러운 안개 기운으로 깊어 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안개 기운인지 가을 기운인지 모를, 파스텔화 효과 같은 것이 참 좋다. 그래서 나는 불타는 단풍보다 은은한 단풍, 얌전한 들국화, 쓸쓸한 코스모스, 서러운 듯한 억새들이 나를 기다린다.
구미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국도로 선산 나들목으로 들어갔다. 공사 중이라는 안내 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국도가 오히려 더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남상주-청원 고속도로로 해서 속리산 나들목으로 들어가 도착하니 11시 40분 정도, 적당히 도착했다. 비가 약간 흩뿌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했더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근처를 잠시 돌아보고 오려는데 아무래도 비가 심하게 와서 그냥 돌아왔다. 인공폭포 앞에 스님의 색소폰 연주가 눈길을 끈다. 자선 모금이란다. 스님도 이런 활동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짐을 방에 옮겨 놓았다. 방은 크고 깔끔했다.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12시 40분쯤 ㅊ네부터 시작해서 ㅇ네, ㅌ네가 도착한다. 근처 버섯전문 식당에 가서 버섯정식을 시켜서 먹었다. 동동주도 한잔씩 했다. 참 기분이 좋다. 즐거운 시절의 추억에 벌써부터 흠뻑 젖어든다. 옛날이야기 안 해도 그냥 분위기만으로도 추억에 젖어든다. 정말 남다른 체험, 아픔이랄까, 그 뭐랄까.
근처를 또 둘러보다가 호텔에 돌아와서 모임을 가졌다. 스님의 색소폰 연주에 대해서 생각이 다 다르다. 낮에 한 과식으로 저녁은 생략하고 가져온 간식과 술로써 대신했다. 우리가 준비한 감, 사과, 귤, 메뚜기 튀김, 양주 등. ㅌ네가 준비한 밤, 찰떡 등만 해도 남을 지경이었다. 막걸리와 홍초, 양주 등 난 사양하지 않고 거나하게 취했다. 정말 기분이 좋다. 모든 게 잊어진다. 그냥 즐거운 기분만 한껏 고조된다. 정말 행복한 오후였다.
근처 노래방에 가서 뒤풀이를 하였다. 취기가 고조되니 율동도 저절로 나온다. 모두들 놀란다. 나도 몰입 또 몰입한다. 이건 나를 위한 치유다. ‘꽃물’, ‘꽃은 결코 한 나비를 위하여 피지 않는다.’ 등 거의 10여곡 발표했다. 흥겹다. 11시 지나서 나왔다. 회장 방에서 모여 내년 여행 계획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방도 넓고 쾌적하다. 이런 여유 있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여행의 묘미다. [2013. 11. 2. 토. 약간 흐리다가 비]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약간 쓰릴 뿐 다른 탈은 없는 것 같다. 서북쪽 창으로 내다보니 뿌옇게 흐린 속리산 초입에 가을이 가득 내려 앉아 있다. 8시까지 식사하고 일단 등산로 삼거리 세심정까지 걸었다. 모두들 우리 내외 보고 자꾸 이런저런 농을 건다. 이젠 그런 게 싫지 않다. 편하다. 즐겁다.
아직 뿌연 운무가 내려 앉아 있었다. 다리가 좀 저려오는데 주저앉아야 할 정도도 아니다. 그래도 좀 불편했다. 아내가 옆에서 나를 부축한다. 좀 근심스런 표정으로 조심스레 날 살핀다. 그런 아내가 고맙다. 이제 이 정도 불편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스틱을 사용한 게 많이 편하다. 세심정에서 차 한 잔씩하고 내려 왔다. 거의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내려오는 길은 햇빛이 환했다. 단풍 든 잎들이 햇빛에 비쳐서 더욱 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점심 요기 간단히 하고 2시 15분쯤 헤어졌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두 번이나 손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한다. 실로 이렇게 공감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로 했었다.
돌아오는 길, 공사로 좀 헤매다가 구미 무을면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다시 선산 나들목으로 들게 된다. 제법 이어지는 구미 무을 들녘, 거의 추수가 다 끝난 들판은 늦가을의 쓸쓸함과 호젓함이 함께 내려 앉아 있었다. 좁은 농로 같은 지방도가 정겹고 아늑하다. 아내는 이런 길이 좋다고 했다. 아내도 역시 나와 같은 정서가 된지 오래다. 약간 흐린 무을 길은 다소의 낯섦과 아늑한 향수를 자아낸다.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이 정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에 초등동기 시내 친목회 모임, 소주 서너 잔 했다. 그래도 취기가 올라서 기분이 약간 고조된다. 정다운 어릴 적 친구들, 여전해서 좋다.
오늘도 잠이 안 올 때, 여느때처럼 시집을 읽었다. 안도현님의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강’에서 ‘너에게 가려고/나는 강을 만들었다.//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 보냈고/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울음은 강을 만들었다/너에게 가려고’가 전문이다. 사물 바라보는 시선이 치밀하고 밀착되어 있다. 사물의 인격화가 돋보인다. 그러니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 법. 나도 좀 닮아 보아야 하겠다.
다음은 황동규님의 평가다. <안도현은 화해의 시인이다. 불화 속에서도 그는 화해의 틈새를 찾아낸다. 그 행위 뒤에는 세계와 자신을 가능한 한 밀착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그는 세계를 아름답게만 보려고 하지는 않지만, 밀착이 아름다움을 만들어준다.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그 밀착은 예컨대 이끼를 “그늘의 육체”라고 부르게 하고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서 “간격과 간격이 모여/울울창창 숲을 이른 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적막 안에서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를 발견하게 한다. 적막에 간절한 모습을 주고 산불이 쓸고 간 폐허의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에서 숲의 원(原)구조를 찾는 것이 큰 화해의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2013. 11. 3. 일. 약간 흐리다가 갬] 2020.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