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의 늦가을 자작나무 숲길, 셋째 날(2/2)오후 4시가 아직 멀었는데도 날은 이미 밤중처럼 깜깜해졌고 엷은 불빛을 머금은 빗물에 번들거리는 모든 게 낯설다
청솔고개
2020. 11. 16. 20:58
홋카이도의 늦가을 자작나무 숲길, 셋째 날(2/2)
청솔고개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한참 깊은 산길을 달리니 마침내 온천 마을이 나타난다. 오후 4시가 아직 멀었는데도 날은 이미 밤중처럼 깜깜해졌고 엷은 불빛을 머금은 빗물에 번들거리는 모든 게 낯설다. 이게 이국적 풍광이라는 건가. 어둠 속에서 온천 마을답게 곳곳이 허연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石水亭’[SEKISUITEI, 세키쉬테이]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비를 흠뻑 맞고 들어갔다. 여행사에서 나눠준 안내서에는 외국인은 바로 프런트에 가서 체크인 수속을 하면 된다고 해 놓았지만 “웨이트, 웨이트!”하면서 서툰 영어 발음으로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직원들은 자국인 수속에 여념이 없다. 바로 현지 호텔 안내원이 뭐라고 장황하게 일본어로 설명을 하지만 우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알아듣는 체 하는 거다. 다 듣고 난 뒤 나중에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일어, 영어 단어를 섞어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여권과 명단을 확인하더니 방 열쇠를 건네준다. 큰 건물이 서너 동 정도 있는 아주 큰 호텔인데 우리 숙소는 바로 옆 동 3층이다.
올라가기 전에 地獄谷[지고쿠다니, JIGOKUDANI]을 지금 갈 수 있으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더니 처음엔 일본어로 답해 주다가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걸 알고는 영어로 “피브티 미니츠”라고 짧게 말한다. 우리는 룸에 들어갔다. 그래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있어서 우리를 따라 객실 서비스 가던 참한 종업원에게 방위치, 식당 위치, 식사 시간 등을 물었더니 수줍게 일본어, 영어로 섞어서 말한다. 대략은 알아듣겠다. 방까지 들어와서 류카다 등 온천 료칸식의 숙소 사용법도 직접 시범을 통해 알려 준다. 공용온천 사용 시간을 물어보았는데 그 종업원이 잘 못 알아 들어서 한자어로 ‘恒時’ 라고 쓰면서 “애니 타임?”하고 물었더니 “예스!”라 답한다. 이제 겨우 통한다. 이 호텔 생활에 대한 게 짐작된다. 이 모든 게 미리 배부한 안내서에 자세히 나타나 있었는데 그땐 그걸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장식과 인테리어가 왜풍(倭風)이다. 문의 양식, 천장 양식도 모두 료깐[旅館]풍이다. 묘한 분위기,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에 나오는 그 기생이 머무는 그곳이 떠오른다. 가이드북에는 이런 객실을 화실(和室)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오후 5시 좀 지나 짐은 대략 정리하고 바로 호텔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내려갔다. 우의를 걸치고 우산도 준비했다. 밖은 벌써 한밤이다. 가로등이 훤히 비치어 길을 번들번들 현혹하고 있다. 비도 제법 세차게 뿌리고 있다. 왼쪽 계곡엔 폭포수 같은 물소리가 들린다. 좀 지나가니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양옆으로 온천호텔 건물이 즐비하다.
5분쯤 가니 갈림길이 나와서 마침 지나가는 고등학생 쯤 되는 여학생한테 물었더니 저도 서투른 영어가 겸연쩍은 듯 영어로 대략 설명해 준다. “고우 스트레이트, 앤드 돈트 고우 빌딩 사이드 로우드”라고 들린다. 곧장 가되, 건물 옆길로 가지마라는 뜻인 것 같다. 모르면 현지어도 하나 들어 익힐 겸 영어도 시험할 겸 무조건 묻는 거다.
갈수록 비가 더 세차게 내린다. 간간히 벌써 다녀오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보인다. 바로 근처인가 보다. 주차장과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에도 사람은 없다. 희한하게도 지금 여기 천둥과 번개가 내리친다. 이래서 지금은 지옥인가 보다. 아내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표한다. 좀 가다가 되돌아가잔다. 아내 보고 내가 같이 가니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독려했다.
멀리 정말 흑암이 가득한 지옥 계곡 같은 곳에서 김이 막 피어오른다. 그 모습이 제법 밝게 장치한 가로등 조명에 어우러져 기묘한 정경을 자아낸다. 아내는 또 겁에 질려 이까지 와서 김 솟아나는 것 봤으니 그만 가자고 한다. 아내는 정말 지옥 계곡을 보았던 것인가. 우레와 번개가 난무하는 계곡. 나는 또 큰 소리로 독려한다. 가로등이 끝나는 지점에 ‘鐵地獄’이 있다고 되어 있어 그곳까지만 가 보자고 했다. 아내는 뇌성벽력(雷聲霹靂) 지옥곡(地獄谷)에 다가갈수록 두려운지 내 팔을 더욱 힘주어 붙잡는다. 이런 아내의 모습이 내겐 늘 귀엽고 매력적인 것이다. 비를 놋날 같이 맞으며 우린 지옥곡 끝까지 다가간다.
이 순간이다. 여행은 이 한 순간, 평생 죽을 때까지 잊어지지 않은 이 한 순간을 위해 준비되는 것 아닌가.
‘鐵地獄’에 다가갔다. 간헐적(間歇的)으로 뜨거운 물이 마치 옛날 고향집 큰방 구들목 술 단지에 술밥이 괴듯이, 죽이 끓듯이 펄떡거린다. 그 순간을 잡으려 디카와 폰카메라 모두 동원해도 안 된다. 셔터가 안 터진다. 지옥은 원래 이런 곳인가. 지금 생각하니 동영상에라도 채록해 놓았으면 했지만 그 한 순간은 다른 데보다 영원히 내 뇌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내는 겁을 또 낸다. 나도 솔직히 저 펄펄 끓는 죽같이 뜨거운 철지옥 용해물질이 내게 확 덮친다면 난 제철소 용광로의 용암을 덮어쓰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 바퀴 돌다가 그냥 황망히 떠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뇌성벽력의 강도가 심하다. 근처 다른 곳을 둘러보자는 말을 아내한테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거다. 아직 오후 5시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여긴 지옥답게 한밤이다. 안내 표지판 앞에서 한 장씩 채록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라도 와 볼거나. 아쉽지만 멀리서 김이 무섭게 솟아오르는 지옥곡의 전경을 이 밤에는 그냥 이렇게 보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온천욕 복장으로 나다니고 있다. 식당에 바로 들어갔다. 온몸이 다 젖어있었지만 시간 절약상 그냥 밥부터 먼저 먹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식당 안에도 모두 온천욕복장 아닌가. 이른바 ‘유카다’라는 일본 료칸 온천욕복장이다. ‘설국’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듯하다.
일본 노인부부 가족들이 모두 유카다를 단정하게 걸치고 열심히 대화하면서 식사를 즐기는 모습에서 말만 듣던 일본 노인 복지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것 같다. 식사는 풍성했다. 어제 맛있게 먹었던 초밥, 그 외 뭔지도 알 수 없는 메뉴도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내 뱃집이 많이 늘어 날 것은 확실하다.
포식하고 화실(和室)로 돌아왔다. 반대편 창 너머는 대숲이 자부룩한데 빗물에 젖어 촉촉한 촉감이 만져지듯 정겹다. 유카다 입은 아내의 모습을 채록해놓았다. 화장기 없이 참하게 입은 아내 모습이 제법 어울린다고 할까. 나도 입어 보았다. 좀 설렁하고 헐렁하다. 그래서 히터를 올려놓았더니 덥다. 첨엔 설렁해서 어떡하나 했는데 오히려 덥다. 출입문의 일본식 그림 문양, 천정의 서까래, 일본풍의 각종 집기, 금고, 장롱, 탁자 등 아주 올망졸망하고 다양하다.
밤은 깊어가고 늦가을 비는 더 세차게 내리는데 잠은 오지 않는다. 낯선 이국, 여사(旅舍)에서 객수(客愁)가 더 깊어진다. 살아가는 게 다 이러하니 어쩌랴. 평생 나그네로 살아가는 심사(心思)처럼. [2014. 11. 12. 수.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