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설 1/첫서리 내린 들길로, 산길로 걸어서 학교로 가고 있는 영희와 철수, 그 길에는 무서리가 가을 들풀을 덮고 있고 짙은 자색(紫色) 들국화는 더욱 소슬한 모습이다
청솔고개
2020. 11. 18. 17:25
가을의 전설 1
청솔고개
드디어 늦가을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늦가을은 첫서리와 성에로 그 그림이 그려진다.
⁰‘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런 삽화가 늘 생생하게 기억된다. 먼 산 가까운 들의 풀과 나무들은 옅은 가을 색에서 더욱 짙은 가울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숲은 나날이 달라지게 잎들이 물들어 간다. 첫서리 내린 들길로, 산길로 걸어서 학교로 가고 있는 영희와 철수, 그 길에는 무서리가 가을 들풀을 덮고 있고 짙은 자색(紫色) 들국화는 더욱 소슬한 모습이다. 첫서리 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 같다. 그 파리한 낯이 가끔은 마치 내 것이라도 되는 듯 안 돼 보인다. 연한 남색(藍色)의, 자그마한 얼굴을 한 들국화는 더욱 애잔해 보인다. 어린 마음에도 무언지 모르게 슬프다. 그래도 교과서에는 은행나무, 떡갈나무, 미루나무, 버드나무, 감나무 등 온갖 나뭇잎들이 가을을 입고 있는 모습이 하도 곱고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걸 보는 순간 막연히 슬퍼졌던 마음이 좀 위로를 받는다. 그 옆에는 서리와 눈의 결정체 그림도 예쁘게 찍히듯 박혀 있다.
‘국민학교’ 국어, 자연, 사회 책에 그려져 있는 늦가을, 초겨울 풍광에 대한 강렬한 인상 때문에 겨울방학 때까지는 늘 그 교과서의 그 그림들을 생각하면서, 또 주위에서 찾아보면서 학교 가는 길을 걷는다.
어느 일요일 오후다. 나는 비료포대기를 들고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¹활대를 어깨에 메고 근처 무지당 ²갓에 갔다. 이곳은 봄에서 가을까지 우리 마을 소들의 쉼터인데, 이제 추위 나고부터는 산에 소 먹이러 가지 않기 때문에 텅 비어 있다. 지난 봄, 여름 초가을 내내 오전동안 소들은 여기서 시원한 공기를 쐬면서 푹 쉬었던 곳이다. 이 솔밭에서 학교 석탄 난로 ³불살개로 쓸 솔방울을 주워서 한 포대기 채우면 된다. 키가 작은 내가 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지만 솔방울 한 포대를 들고 가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다. 그냥 질질 끌고 가기도 한다. 곧 추위가 나서 방 문고리가 손에 짝짝 얼어붙거나 귓불마저 빨갛게 되는 날이 되면 학교 창고에 저장해 놓았던 솔방울을 불살개로 해서 검고 납작한 돌덩어리 같은 석탄에 불을 붙인다.
그 당시 교실 난방으로 난로에 때는 석탄은 넓적넓적한 게 마치 청석 조각 같기도 하고 얇은 구들장 쪼개진 것 비슷하였다. ⁴깔비나 ⁵까디이까지 넣어서 피워도 좀처럼 잘 붙지 않는다. 난로 피우는 날은 온통 샛노란 석탄 연기가 온 교실에서 피어올라 온 학교를 뒤덮는다. 멀리서 보면 학교 건물에 불이라도 난 것 같다. 그러면 영락없이 첫 시간 수업은 거의 난로 불 피우는 걸로 마치게 된다. 난롯불 피우는 기술이라도 익히는 실기 수업(?)으로 바뀌는 거다. 그래서 모두들 ‘오소리 잡는’ 첫 시간 수업이라고 불렀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힌다. 그러면 바깥 공기가 들어와 더 춥다. 모두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도, 그 독가스 같은 샛노란 연기에 얼굴도 노랗게 뜨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이 ‘오소리 잡는’ 수업이 즐거웠다. 이 난로가 달기 시작하는 3교시 쯤 지나면 우리는 각자가 싸온 도시락을 얹어 놓는데 때로는 반찬 국물이 흘러내리거나 쏟기기도 하고 혹은 밥이 새카맣게 타서 반쯤은 누룽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도시락을 아래 위 잘 바꿔줘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체육 시간이나 교실을 비울 때는 주번 아이의 주 업무는 맨 아래 놓여 있는 도시락을 적절히 위에 위치를 옮겨서 도시락이 눋거나 타는 사고를 최소화하는 거다. 주번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도 첫 추위 나는 초겨울이면 오랜 동안 어김없이 이 노란 연기의 첫 수업이 생각나곤 한다.
2020. 11. 17.
[주(注)]
⁰‘국민학교’ : 초등학교의 이전 명칭
¹활대 : 원뜻은 ‘돛 위에 가로 댄 나무’인데 여기서는 '대나무로 된 장대'의 뜻을 가진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