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가을의 전설 2/추수가 끝난 논에 들어가서 오목오목하게 들어간 데를 손가락이나 꼬챙이로 파 보면 영락없이 논고디가 한 개씩 볽아진다
청솔고개
2020. 11. 18. 17:30
가을의 전설 2
청솔고개
늦가을이 되면 갑자기 농촌은 한가해진다. 적막해진다.
이 때 농촌은 이른바 농한기에 접어든다. 곳곳이 여러 가지 행사로 축제 분위기가 된다. 늦가을 ⁰논고디 잡기, 봇도랑이나 우물 퍼서 고기 잡기 등이 벌어진다. 들녘은 이미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고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물이 다 말라가는 봇도랑이나 관정처럼 만들어진 우물에는 고기잡이 판이 흥겹다. 삼삼오오 모여서 바께스랑, 주전자랑 담을 수 있는 모든 걸 가지고 모여서 물을 푸고 싯누런 미꾸라지, 메기, 가물치, 잉어 새끼, 송어 등이 꿈틀댄다. 찬바람이 불어와서 모두들 오들오들 떨고 있지만 고기 잡는 재미는 하루 종일 쏠쏠하다. 어린 아이들은 옆에 추수가 끝난 논에 들어가서 오목오목하게 들어간 데를 손가락이나 꼬챙이로 파 보면 영락없이 논고디가 한 개씩 ¹볽아진다. 잠시만 하면 마치 갯벌에서 조개를 캐듯 한 바게쓰씩이나 캐 낼 수 있다. 이걸 된장에 넣어서 끓여서 먹으면 별미다.
온 들녘과 산록이 누릇누릇해지면 어김없이 학교에서는 하루 이틀씩 단축 수업을 하고 인근 야산에 풀씨를 따러 학생들을 동원한다. 이때는 정말 걸핏하면 모든 국책 홍보를 이런 식으로 학생 동원을 통해 해결하는 게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래도 좋다. 학교 교실에 갇혀 있다가 교실 문만 나가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다. 풀씨는 그 당시 헐벗은 사방(砂防)용, 조림(造林)용으로 수거되는 것이다. 지금에야 온 산야가 녹색의 향연을 벌이고 있지만 6.25 직후 50년대 말, 60년대 초는 암만 둘러봐도 민둥산 일색이었다. 여름만 되면 황토물이 산 위에서부터 쏟아지고 산사태가 잇따르는 것이다. 이걸 방지하는 게 급선무인데 이른바 사방사업이다. 우선 풀을 심어서 토사가 흘러내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이 풀씨를 이듬해 식목일 전후해서 뿌리면 얼마간 민둥산은 방지하고 이렇게 하는 게 우리나라의 녹화사업의 발단인 셈이다.
어찌 풀씨 따기뿐인가. 봄가을 가정실습 3일 정도는 자기 집 농촌 일손돕기용이고 나머지 자주 동원되는데, 보리 베기, 모심기, 나락 누운 거 일으켜 세우기, 나락 베기, 보리밭 밟기 등에 어린 학생들이 수시로 동원되었었다.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이런 일을 집에서도 하도록 독려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쥐잡기 운동 기간에는 쥐약을 놓고 그 쥐약 먹고 죽은 자기 집안의 쥐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 쥐꼬리를 끊어서 학교에 내야 했었다. 전 국민 파리잡기 운동 기간에는 잡은 파리를 성냥 통에 꼭꼭 채워 넣어서 학교 담임선생님한테 내야하고 전 국민 구충 기간에는 산토닌이란 구충제를 일제히 먹고 뒷간에서 볼일 보면서 자기 변을 보고 몇 마리 나왔는지 그 숫자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뒷집 한 아이는 평소에 핼쑥한 낯빛으로 참 허약해 보였는데 빈속에 산토닌을 먹고 약기운을 못 이기어 얼굴이 창백하게 되고 쓰러진 일도 있었다. 물론 모두들 크게 놀랐고 그 약을 무서워하게 된다. 또 항문으로 나와야 할 회충이 입으로 꾸역꾸역 토하는 엽기적인 일도 목격하였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 세대들은 참 전설 같은 세월을 살아온 거다. 2020. 11. 18.
[주(注)]
⁰논고디 : ‘논우렁이'의 토박이 말
¹볽아진다 : ‘까진다’, '알맹이가 튀어나온다'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