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길 따라’ 제11일(로마 비스콘틴 중학교, 트레비 분수, 포로로마노, 대전차경기장, 천사의 성, 스페인 광장)
청솔고개
2020. 12. 7. 05:16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길 따라’ 제11일(로마 비스콘틴 중학교, 트레비 분수, 포로로마노, 대전차경기장, 천사의 성, 스페인 광장)
청솔고개
로마에서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09:20 호텔을 출발했다.
가이드는 마지막 날의 아쉬움을 표하면서 못다 한 이탈리아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탈리아의 의료제도는 거의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잘 되어 있다. 돈 없어서 급한 수술을 못 받는 경우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돈 없어 죽는 경우는 없다. 앰뷸런스가 수시로 운행되고 있어 별다른 입원 수속은 필요 없다.
시내에 있는 비스콘틴 중학교 방문을 했다. 400명이 재학하고 있고 교직원은 35명인데 대부분 여교사이다. 체육은 좁은 학교 시설에 운동장이 구비되지 않아서 인근 공설운동장에 전교생이 이동하여 수업한다. 급식은 하지 않으며 점심은 집에서 먹고 오후에 예체능 수업을 한다. 아침에는 영어, 오후에는 불어를 공부하며 영어 수업은 주당 3시간 정도. 학부모에게 사전에 통보한 후 학생 체벌 할 수 있다. 수학 수업은 주당 6시간이나 여기서도 예외 없이 수학 성적은 형편없다고. 평가는 매달 한다. 교장은 학기 초 학기 말 한 번 정도 미팅하면서 학부모와 상담해서 진로 등 결정을 한다.
교외 넓은 곳에 있는 현대식 건물의 학교를 방문해보지 못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학교 시설과 교육 기자재 면에서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것 같다. 물론 시설과 기자재를 얼마나 효율성 있게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겠지만. 오래된 낡은 건물 일부를 학교 교사로 사용하고 있어서 무척 좁고 불편한 건 사실이다. 건물은 우중충하고 지저분해 보였으며 층마다 게시물이 빼곡히 붙어 있다. 구석방, 다락방 같이 어둡고 좁은 이 교사는 로마 전통 건축을 보존하려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정신, 전통 문화 보전 정신의 소산 이라고 이해하자.
수업을 참관했다. 수업 분위기는 매우 활발해 보였다. 시설이 이렇게 낙후한 것은 로마라고 하는 고도를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했다. 학교 건물을 제대로 지으려면 개발을 해야 하는데 개발은 곧 전통 유적을 훼손하는 것이 되므로 불편함을 감수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유적지의 고도 보전 정책 논쟁이 떠오른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해묵은 숙제가 여기에도 있다. 하기야 시민들이 협조하고 공감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오후에는 시내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트레비 분수, 포로로마노, 대전차경기장, 천사의 성, 스페인 광장을 차례로 관람하면서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시내 유적지는 로마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애정 행각으로 더욱 유명세를 치르는 것 같다. 프렌치키스에 빠져 있는 스페인 광장 계단의 청춘 남녀를 카메라로 클로즈업하여 보기도 하였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도 던져보면서 사랑을 점치기도 하고 포로로마노의 폐허와 잔해를 통해 로마의 영광을 그려 보기도 하였다. 이 광장이 고대 로마의 사법, 정치, 산업, 종교, 전통, 가치의 출발점이다. 거대한 원주, 셀 수 없이 버티고 있는 각종 개선문 등은 그날의 로마의 영광을 상상하게 한다. 그 날 로마인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잡초로 무성한 로마시대 전차경기장 흔적에서 영화 ‘벤허’의 대전차경주의 채찍 소리와 함성 소리가 오버랩 된다.
자유로운 쇼핑도 즐기고 남은 시간은 잊지 못할 성 베드로 사원 광장을 다시 한 번 방문하고 광장을 달리는 마차 행렬을 통해서 영화에 나오는 고대 로마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로마 여행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로마여 안녕!
21:35 로마 발 서울행 KE916은 밤을 새워 날아서 나를 코리아로 데려다 줄 것이다. 주마등같은 여정을 머리에 떠올리며 피로한 두 눈을 감고 곤한 휴식에 빠져 들어갔다.
아래 [ ]안은 괴테의 기록이다.
[6월 20일 로마
최근에 저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만을 보려고 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전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6월 말, 로마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으려니까 제 젊은 시절의 사소한 것까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물의 고귀함과 품위가, 저의 궁극적인 존재가 이를 수 있는 한 높고도 먼 곳까지 저를 이끌어 올립니다. 저의 안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워졌고 저의 손재주도 아주 서툴지는 않다고들 합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로마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마치 물속의 물고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또는 다른 액체 속에서는 가라앉고 말, 수은의 표면에서 떠도는 한 조각 알맹이처럼 부유하고 있습니다. 제 사색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행복을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 추서 - 교황의 양탄자
이 모든 것들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불가피한 인체의 조화가 다양한 삶의 움직임을 통해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정녕코 이 그림은 우리에게 영원한 문제성을 제기해준다. 우리에게 그 해결 방안이 가능하고 명백해질수록 우리로 하여금 더욱 찬탄케 하는 그런 문제성을 말이다.
7월 5일 로마
지금의 제 생활은 완전히 젊은 날의 꿈같습니다. 제가 그 꿈을 향유하도록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이것 역시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는 데 그칠지 알고 싶습니다.
저에겐 모든 것이 놀랍도록 수월해져갑니다 (이건 이론상의 문제입니다. 그 일을 행한다는 건 일생을 요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제 마음 속에 어떤 이름이나 단어도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위대하고 경외스러운지 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인식하려 합니다. 이것은 모방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체해선 안 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제 머리 속에는 온갖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해내는 일입니다. 바람직한 일은, 대상을 다른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 나타나도록 잡아두는 것입니다.
7월 16일 로마
이렇듯 매일매일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영원불멸한 옛 것을 대하노라면 크나큰 기쁨이 샘솟아 오릅니다. 저의 안목도 아주 향상되었으며 머지않아 전문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7월 20일
저는 바로 이 시간부터 평생 저를 따라다니며 괴롭혀온 커다란 결점 가운데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결점은, 제가 하려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의 수법을 결코 배우려 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그 결과 저는 커다란 천부적 재능을 갖고서도 거의 해놓은 일이 없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행운이든 우연이든 정신력을 무리하게 사용하려 했던 겁니다. 어떤 일을 심사숙고해서 잘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두려웠고 완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 이와 유사한 결점은, 제가 창작이나 일에 몰두하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시간 내에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결합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씩 이루어나가는 일이 저로선 지루하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제 자신을 바로잡을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술의 나라에 와 있습니다. 전문적인 것을 면밀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안식과 기쁨을 주고 다른 무엇을 창조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7월 24일
이런 산책을 할 때마다 아름다운 유적들을 얼마나 무수히 만나게 되는지! 하지만 이 모든 것 가운데 아주 일부만을 내 것으로 하려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간의 삶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서로 배워가는 많은 인간의 삶 역시 말입니다.
7월 29일
미술작품은 보기 위한 것이지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작가의 생각을 전해주고 간직케 하기엔 그 이념이 너무 손상되어 있습니다. 특히 입이 형언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7월 30일
달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달이 안개를 헤치고 솟아오를 땐 온통 노랗고 따뜻한 모양이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늦은 밤은 맑고 정겹습니다.
7월 31일
저는 미켈란젤로 편이었고, 그는 라파엘로 편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레오나드로 다빈치에 대한 공통된 칭찬과 함께 논쟁을 끝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단지 이름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뛰어난 인간들이 지니는 생생한 가치의 개념이 점점 더 완전해져간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8월 1일
뚜껑 없는 병을 물속에 처박으면 쉽게 물이 차듯이, 감수성이 있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쉽게 충실을 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향으로부터 예술적인 요소들이 밀려옵니다.
8월 11일 로마
장래의 일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합시다. 아무도 자신을 바꿀 수 없으며,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8월 18일
사람들이 부족한 점만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8월 23일
시스티나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읽습니다. 이곳에는 그들이 우리의 머리 위나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 마침내 우리가 아는 모든 사물의 알파요 오메가인 인간의 모습이 저를 붙잡고, 저는 그것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을 놓지 않겠나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32장 26절) 나는 불구가 되도록 싸워야 합니다.
8월의 보고
요즈음에는 미켈란젤로가 새삼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여타의 훌륭한 특징 말고도 채색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라파엘로 가운데 누가 더 천재성을 지녔는가 하는 논쟁이 유행처럼 되었다.
한 인간의 위대한 재능을 이해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두 사람의 재능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겠는가? 우리는 그런 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파당성을 취한다. 그 때문에 예술가와 작가에 대한 평가가 늘 흔들리고 오로지 한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이 그 시대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논쟁이 나를 미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논쟁일랑 내버려두고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모든 가치와 품격을 찾으려 했으니까 말이다.] [1997.12.2.(월, 제11일/12일)]
2020.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