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겨울로 1/지금도 잊지 못할 봄바람 같은 그 엄마의 품. 엄마의 무명 앞치마 폭. 엄마의 낯에서 풍기는 동동구루무 내음. 그래서 엄마는 나의 영원한 연인이다

청솔고개 2020. 12. 10. 15:25

겨울로 1

                                                                           청솔고개

   한겨울이다. 첫추위가 나면 우리는 ⁰수게또를 만들어서 동네 미나리깡에 가서 시동을 걸어본다. 녹이 쓴 수게또 날이 좀 질이 날 것 같다. 한겨울이 되어 좀 더 추워지면 맞도랑으로 간다. 얼음이 제법 얼어 있다. 모두들 저수지 도랑 신축 공사장에서 구한 굵은 철근으로 만든 최신품을 자랑한다고 난리다. 난 아직 가는 철사로 만든 볼품없는 수게또다. 그래도 좋다. 손등이 얼어 터진다. 피가 철철 난다. 동동 구루무도 귀한 시절이다. 오전은 그렇게 수게또 타기에 몰입하지만 오후 되면 얼음이 좀 녹기 시작하고 금이 난다. 실룩실룩 고무얼음판이 된다. 이게 더 재미다. 모두들 조심스레 얼음판들 꿀려본다. ‘찌이익’ 하고 얼음이 깨진다. 그러면 틀림없이 한두 녀석은 빠지고 만다. 수리조합 둑에 이미 찌른 불에 발을 말린다. 불똥이 마구 날아오른다. 싸구려 나일론 양말은 그 순간 구멍이 숭숭, 이젠 집에 가면 엄마한테 모두들 야단맞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렇게  겨울날 하루는 저물어 간다. 겨울날 저녁답 우리 엄마가 작은 삽짝에서 나 부르는 소리는 지금껏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다정한 소리로 남아 있다.

   고향마을 어린 시절, 한겨울이다. 동무들과 골목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면서 ¹때기치기, ²다마치기, ³맞대롱하기, 숨바꼭질 같은 거 정신없이 하다가 문득 이제쯤은 엄마가 날 부르러 올 텐데 생각하면 바로 그때다.

   “ㅊ아! ㅊ아! 야야~~ 밥 묵어래이. 끼 때 됐대이…….”하는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엄마는 대청마루에 있는 베틀에서 종일토록 베를 짜다가 허리도 펼 겸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동네 우물집인 우리 집 작은 삽짝을 밀고 나를 보고 빨리 오라 손짓하신다. 자그마한 몸짓의 우리 엄마는 머리에 하얀 명주 수건을 쓰시고 고운 얼굴에 참한 미소로 나를 보신다. 난 엄마의 보드라운 손길을 잡고 끌면서 포근한 앞치마에 휘감겨 버린다. 아! 지금도 잊지 못할 봄바람 같은 그 엄마의 품. 엄마의 무명 앞치마 폭. 엄마의 낯에서 풍기는 동동⁴구루무 내음. 그래서 엄마는 나의 영원한 연인이다. 우물 옆 담벼락 밑에는 우리 ⁵정구지 밭이 있었는데 겨울 정구지들은 낯빛이 누르스름하게 바랜 체 통통하게 재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동네 아지매들은 이 정구지 밭을 옆으로 하고 동네 우물로 모여든다. 곧 보쌀 삶아서 저녁 안친다고 부산하고 보쌀 씻은 물이 뽀얗게 우물 아래에 있는 미나리 깡으로 흘러들어간다. 우물가 독에는 묵 쑨다고 버지기에 담아 놓은 꿀밤알들이 보글보글 괴고 있다. 곧 굴밤의 떫은맛은 가시고 보드라운 묵채가 될 게다.

   그날 저녁에 베어 문 *짠지 한 잎에 꽁보리밥 한 숟가락 맛이란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밤 나기는 정말 심심하고 적막하여 식구들 끼리 있거나 동무들을 만나도 **군임석 생각이 많이 난다. 묻어 놓은 것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파내서 먹을 것도 있는 편이다. 깊어 가는 겨울 초저녁에는 우리 집 도장의 독에서 퍼먹었던 쨈처럼 익어서 묵혀진 ⁶꾀양 알의 들쩍지근한 그 맛이 그립다. 씨가 너무 많아 입안에서 그 씨를 볽아 내려면 ⁷샛바닥이 얼얼하고 볼때기가 얼얼해서 나중에는 입놀림마저 힘들지만 그래도 좋다. 어떤 때는 얼어붙은 꽤양 알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찐득찐득하기도 하다. 특히 몰래 들락거리며 한 숟가락씩 퍼 묶는 재미는 마치 도둑고양이나 생쥐가 뭘 훔쳐 먹는 재미 같다고나 할까. 채전 밭 ⁹무시구디이에서 무시는 주로 한겨울 한밤에 아이들하고 놀다가 장난삼아 “누구 무시구디이 파자.” 하고 정해지면 ⁸장껨뽀시해서 파러 가는 아이를 정하고 나머지는 망을 보는 식으로, 바로 무시구디 급습 작전을 수행되는 것이다. 무시이파리를 떼고 진녹색으로 된 ₀순어리 부근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맛이란 별미 중 별미라서 요즘도 한 번씩 ₁비묵어 본다. 가끔은 무시가 바람이 들어서 허벅허벅해서 맛이 없으면 ₂뱁차뿔개이를 밤톨처럼 깎아서 오싹오싹 먹으면 그 맛이 마치 생밤 맛처럼 ₃꼬시다. 그래도 누구 무시구디이가 파헤쳐졌다는 소문이 나는 법은 없었다.

   우리보다 여남은 살이나 더 많이 먹은 동네 청년들은 우리보다 더 컸다고 간땡이 크게 한밤에 남의 집 닭장에서 ₄장닭이든 암탉이든 닥치는 대로 서리해서 먹는다는 말을 무용담 삼아 더러 들었었다. 그래도 그게 잠시 소란으로 그쳤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전설 같은 시절이 생각난다. 그 닭서리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거나 우리 또래가 컸을 때 내가 같이 참여해 본 기억은 없다. 나의 어린 시절 겨울날은 이렇게 하루하루 흘러갔었다.      2020. 12. 10.

                                                                                                        

[주(注)]

⁰수게또 : ‘썰매’의 토박이 말. 앉은뱅이 스케이트에서 굳어진 말.

¹때기치기 : ‘딱지치기’의 토박이 말

²다마치기 : ‘구슬치기’의 토박이 말. ‘다마’는 ‘구슬’이란 뜻으로 일본어의 잔재에서 굳어진 말.

³맞대롱하기 : ‘자치기 한 종목’의 토박이 말

⁴구루무 : ‘크림’의 토박이 말. '크림'에서 굳어진 말

⁵정구지 : ‘부추’의 토박이 말

⁶꾀양 : ‘고욤’의 토박이 말

⁷샛바닥 : ‘혓바닥’의 토박이 말

⁸장껨뽀시 : ‘가위 바위 보’의 토박이 말

⁹무시구디이 : ‘무구덩이’의 토박이 말

₀순어리 : ‘어리순’의 토박이 말

₁비묵어 : ‘베먹어’의 토박이 말

₂뱁차뿔개이 : ‘배추 뿌리’의 토박이 말

₃꼬시다 : ‘고소하다’의 토박이 말

₄장닭 : ‘수탉’의 토박이 말

*짠지 : '김치'의 토박이 말

**군임석 : '군것질, 야식, 밤참'의 뜻을 가진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