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증조부님 기일/귀띰 받아 부엌에서는 종부인 아내가 메를 지어 올리는 진찬(進饌)
청솔고개
2020. 12. 14. 20:22
증조부님 기일
청솔고개
아내가 요즘 무척 신나한다. 이른바 인생 이모작, 삼모작의 출발선상에 서 있는 것 같다. 아내 친구의 시아주버니가 운영하는 인력사무소의 위탁으로 인근 공단에 출근하기 때문이다. 벌써 한 달이 넘어간다. 처음에는 한시적인 이른바 알바로 출발했는데도 말이다. 아내는 ‘힘들다, 아프다, 피곤하다’하면서도 일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거리낌 없이 자기 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런 아내의 모습에 새삼 무척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든다. 그 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느낀 아내의 성향을 보건데 충분히 예견하고 남을 일이지만 이토록 열중할 줄은 몰랐다.
스스럼없는 아내의 이런 생각이나 모습이 난 좋다. 종부로 집안 대소사가 널려 있는데도 아내는 잔업까지 마다 않고 잘도 배겨낸다.
엊저녁에는 인근에 사시는 큰종숙모님을 일찍 찾아뵈어야 했다. 큰종숙님의 기일이어서 참례하게 되어 있는데도 잔업까지 마다하지 않고 다하고 오겠단다. 나는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종부로 종질부 역할을 제대로 못할까봐 그런 것이 아니다. 일 욕심에 피로가 누적되어 건강에 적신호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증조부님의 기일. 당숙과 한 날 기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손자 제사를 먼저 지내게 되었다. 음복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2시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바로 우리 집 제사를 모셔야 하는데 어지간하면 하루쯤은 쉴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다. 그냥 줄기차다. 시간이 없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부탁하고 맞추고 하는 품이 여간 힘들어 뵈지 않는다. 그래도 잘도 처리해 나간다. 아내가 일머리 추어나가는 데는 9단이다.
저녁 7시까지는 모든 준비가 끝나야한다. 6시 다 되어 가는데 아내와 연락이 안 된다. 나 혼자서 답답하다. 퇴근 후 집에 달려왔더니 아내는 보이지 않고 둘째가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아직 안 오셨어요.” 순간 난 좀 속이 틀린다. 늦어도 7시에 제사 시작해야 하는데 6시 다되어 가는데 아직 집에도 도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5시 20분만되면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는데. 내 속이 타는 것 같다.
6시 다되어서야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내가 등장한다.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반긴다. 정말 여유 있는 표정이다. 평소보다 늦은 이유는 오늘도 잔업이 있어서 다른 사람은 남았다고. 그래서 차를 같이 타고 오지 못하고 걸어서 오다보니 그렇게 되었노라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운동 삼아 슬슬 걸어오다가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정말 여유 있는 아내의 대꾸였다. 난 할 말을 잃었다.
이때부터 우리의 동작은 기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내의 자구책. 대응 전략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수 중 나물류는 어제 시장에서 친구한테 부탁해 놓았다가 저녁에 갖다드리면서 부탁을 마쳐 놓은 상태, 편과 ⁰찌짐 종류는 증조부님의 손자가 되는 큰종숙을 위한 제물에서 좀 희사 받기로 약속한 터, 실과는 오늘 아버지께 부탁해 놓은 상태, 시장 전문점에 맞춰 놓은 제수용 ¹마릿고기만 찾아서 가면되는데 뭐 큰 문제 될 거 있느냐 식이다. 그러니 탕과 ²메를 준비해 놓고 7시까지 지낼 준비만 하면 되는 거다. 큰집에 도착하니 6시 좀 넘어섰다. 어머니께서 메 지을 쌀은 앉혀 놓으셨다. 우리는 탕을 끓일 준비로 서둘렀다. 나는 옆에서 ³뒤모도할 만반의 준비 태세로 시립하였다.
제수 용기를 궤짝에서 꺼내어 마른 행주로 닦아낸다. 실과는 참하게 ⁴디매를 한다. 준비하고 남은 제기는 기명 물에 일차 씻어내어 헹군다. 소반의 모사그릇에는 현관에 있는 화분의 흙을 담아내고 거기다가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은 짚을 비스듬히 내리꽂는다. 이 모든 것을 일사불란, 기민하게 처치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이때 아내의 표정을 보니 그 보란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과 웃음으로 나를 맞는다. 뱀처럼 지혜롭게 하랬던가. 아내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건 몰라도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 그 뱀이 독을 쏘면 좀 힘들어질 때도 있지만.
드디어 저녁 7시 5분 전, 일단, 진설(陳設) 즉, 제사상 차림이 갖춰진다. 아버지께서 한복에 도복까지 걸치시고 엄정하게 임석하셔서 병풍의 지방 문구에서부터 법도에 따른 상차림을 점검하시고 “모시자” 하시면 제사 준비 최종 완료다.
우리 형제가 먼저 제상 양단에 꽂아져 있는 촛불에 점촉(點觸)한다. 이후 제주이신 아버지의 분향(焚香), 이때는 동생이 옆에서 성냥불을 켜서 붙여 드린다. 제주의 강신재배(降神再拜), 모든 참례자의 참신재배(參神再拜), 제주의 당연직 초헌(初獻), 초성도 낭랑한 숙부님의 독축(讀祝), 귀띰 받아 부엌에서는 종부인 아내가 메를 지어 올리는 진찬(進饌) 후, 제주의 지명을 받은 아헌관, 종헌관의 아헌(亞獻), 종헌(終獻), 유식(侑食, 혹은 첨작添酌이라고도 함), 계반삽시정저(啓飯揷匙正箸), 합문부복(闔門俯伏, 혹은 합문국궁闔門鞠躬이라고도 함), 계문(啓門), 헌다(獻茶), 철시복반(撤匙覆飯), 사신(辭神), 소촉(消燭), 소지(燒紙), 퇴작(退酌), 철상(撤床), 음복(飮福) 순으로 엄수된다. 제사 삼매경에 몰입된 엄정한 상태라 정말 증조부님의 혼령께서 왕림하셔서 흠향하실 것만 같다.
문득 증조부님의 생전 모습이 눈에 어린다. 내가 초등 2, 3학년 때 증조부님과 나는 친구였었다. 같이 소를 몰고 수리조합 저수지 도랑에 갔었다.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다. 여름날 뙤약볕에 소고삐를 쥐고 그냥 무료하게 서 있는 시간이란 어린 나로서는 좀 힘들었었다. 왜냐하면 또래들은 모두 소를 몰고 산에 가서 소고삐를 뿔에 감고 난 후 소를 방목하기 때문이다. 그네들은 서로 같이 어울려 화실못에서 오후 내내 멱감기도 하고 아니면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겉껍질은 벗겨 내고 솔내음 나는 속살을 하모니카 불듯이 이빨로 벗겨내면서 그 단물을 빨아먹는 재미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난 그런 어울림 가지는 횟수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 당시 유행하는 한명숙 가수의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를 증조부님과 함께 읊조리는 재미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증조부님은 내가 초등 6학년 바로 오늘 영면하셨다. 45년 전이다.
이래서 증조부님의 기일 또 무사히 지나갔다. 아, 살아있음에 매순간 느끼는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2009. 12. 22. 기록]
2020. 12. 14.
[주(注)]
⁰찌짐 : ‘지짐이’의 토박이 말.
¹마릿고기 : 특히‘제사나 잔치에 쓰이는 생선’이란 뜻의 토박이 말
²메 : ‘제사 때, 신위 앞에 올리는 밥’의 다른 말.
³뒤모도 : ‘허드렛일 하는 사람, 보조하는 사람’의 토박이 말
⁴디매 : ‘제수용 실과나 생선을 다듬는 일’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