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물과 원시림, 꽃과 나비의 축제, 남지나해 여행기 3, 바탐섬(BATAM ISLAND)/야자 숲, 방갈로, 원색의 꽃과 잎, 수직으로 꽂히는 적도의 이글거리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시다

청솔고개 2021. 1. 28. 01:14

물과 원시림, 꽃과 나비의 축제, 남지나해 여행기 3, 바탐섬(BATAM ISLAND)

                                                                                    청솔고개

   10:20, 바탐섬을 바라보면서 이민국 수속 후 싱가포르에서 인도네시아 최고 휴양지 바탐으로 향발했다. 원래는 10:30 출발 예정이었는데 10:50으로 늦어져서 11:35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 중 아내가 갑자기 설사를 만나서 화장실에 가버린 상황이 발생했다. 배 출발 시간은 급하고 동행하는 가이드도 없어서 무척 난감했다. 그래도 설사로 우왕좌왕하는 아내의 모습에 내가 너무 다그친 것 같아서 나중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집 떠나면 건강 상태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건강이다. 구경도 고생도 둘째다.

   인도네시아로 건너가는 배 이름은 파이팅 오션(FIGHTING OCEAN)다. 인도네시아 해협을 건너는데 파도가 제법 거칠다. 여기가 바로 태평양 전쟁 때 우리 선조들의 원혼이 버려졌던 곳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 그렇게 많이 수장되었던 말로만 듣던 남양군도다. 이 섬들을 앞으로 바라보면서 왼쪽 센토사(SENTOSA)섬의 야자수 숲이 드리워진 휴양지가 이채롭다. 일행 중 아이들을 포함한 여자 여행객 넷은 싱가포르에 친구 방문 차 바탐으로 동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식구들도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꾸벅꾸벅 존다. 모두들 열대 우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오히려 심드렁한 느낌인가. 여기 언제 다시 오려나. 그러니 이 모든 걸 눈에 깊이 새겨 넣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장면을 언젠가 회상하게 될 그날, 먼 훗날을 위해서라도.

   드디어 멀리 바탐 섬 해안 건물들이 안개가 걷히듯 그 비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1:35, 꼭 50분 정도 걸렸다. 바탐 선착장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다. 바탐섬, 생소한 미지의 섬에 도착하니, 'WELL COME TO BATAM'이 부두 건물 벽면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입국 수속에는 지금의 싱가포르 가이드가 동행할 수 없어서 우리가 그냥 내버려진 듯한 불안감이 든다. 여정이 좀 불확실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그 순간 인도네시아 고유문양의 남방을 입은 눈이 동그란 젊은이가 우리 일행을 보고 반색한다. 우리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자 그 젊은이는 일순 당황한 듯하다가 제법 또렷한 한국어로 상황을 설명을 한다. 그제야 일행은 안심이다. 우리끼리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듯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낯설어서 불안하고 불편한 법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열대 우림이 우거진 적도의 한 복판을 질주했다. 여기도 개발의 상흔이 보인다. 섬의 군데군데는 사막처럼 황폐해져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진초록 야자수와 망고나무의 숲, 새빨갛고 샛노란 원색의 열대 꽃들이 남국의 태양아래 빛과 색의 향연을 벌인다. 그 정열과 현란함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 같다. 온통 나를 사로잡는다. 도중에 익숙한 이름의 '나고야'라고 하는 한국인 경영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옆에서 현지 토산품 전시를 구경하고 민속춤을 관람하였다. 아내는 인도네시아 토속문양이 찍힌 접시 하나를 샀다.

   14:00, 원주민 마을인 민속촌에 도착했다. 출연하는 춤꾼들은 모두들 그 특유의 얼굴에 비해 커다란 눈망울을 한 아이들이라서 살짝 애잔함이 든다. 춤꾼 아이들의 춤을 구경하면서 같이 기념촬영도 하였다. 더욱이 둘째는 원주민 처녀와 파트너 되어서 열심히 춤추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아이가 여행에 흠뻑 몰입하는 것 같아서 좋다. 이 장면을 보는 나도 여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참여하는 것, 함께 어울려서 즐기는 것이 여행의 또 다른 맛과 멋임을 비로소 실감하였다.

   15:00, 바탐 뷰 리조트(BATAM VIEW RESORT)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가자 한 무리의 무희들과 가수들이 우리의 애창곡인 ‘만남’, ‘남행열차’를 멋들어지게 부른다. 갑작스러운 환대에 반가움보다 일순 황당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런 이벤트가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의 서비스임을 인정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잠시 기다려서 우리는 432호 객실을 배정 받고 찾아 들어갔다. 객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은 상상 이상이었다. 첫인상은 마치 열대 우림의 숲 속에 긴 머리를 방금 감고 바로 상큼한 모습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빗질을 하는 아가씨다. 이를 적도의 뜨거움과 원시의 생명력이 결합된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다. 모두들 객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가서 몸을 식혔다. 쾌적함을 즐겼다. 아내는 혼자 객실 베란다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어 준다.

   리조트 뒤편을 걸어보았다. 동북쪽 해안이 바로 잡힐 듯 펼쳐져 있고 가까이 해변에 다가가니, 그 아늑함, 야자 숲, 방갈로, 원색의 꽃과 잎, 수직으로 꽂히는 적도의 이글거리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시다. 그래서 남국의 정취가 무르녹는다. 풀장에서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해변에서 앉았다가 다시 걸어보기도 하였다. 백사장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야자 열매껍질을 만져보고 던져 보기도 하였다. 열대 우림을 흐르는 강물 위에 지은 민속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은 것이다. 자연 그대로다. 더불어 반주 한 잔씩 하고 여정과 흥을 돋우었다. 이곳은 특이한 식당 분위, 특이한 메뉴라서 오랫동안 인상에 남는다.

   이렇게 남쪽나라 적도의 밤은 깊어간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시간으로 00:45, 벌써 1. 29. 자정을 넘겼다. 새벽으로 간다. 싱가포르(SINGAPORE) 시간은 01:45, 여기는 남지나해(南支那海, SOUTH CHINESE SEA), INDONESIA(印尼) BATAM ISLAND이다. 원시 열대 우림 속에서 그 사이에도 스콜(Squall)이 내리 퍼붓는다. 만상은 샤워라도 한 듯이 물을 뚝뚝 듣고 있다. 가로등에 비쳐서 번들거리는 스콜의 빗물 기운은 바로 생명 그 자체다.

   BATAM VIEW RESORT 4층 객실에서 정말 길고도 짧았던 하루를 돌이켜 본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말로만 듣던 남지나해변의 일몰과 낙조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노래 가사로만 들어왔던 남십자성(南十字星)을 찾아 헤매는 행려인(行旅人)이 돼 본다. 그는 오늘도 텁수룩한 수염에 불콰한 얼굴빛으로 삶의 한 정거장에서 세월의 객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가.

   이 순간 아내와의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 딸, 아들과의 정담(情談)이 이처럼 소중할까보냐? 이 순간은 모든 게 살아 있다. 위대한 생활의 발견이다. 이국만리(異國萬里) 남국의 열대, 적도(赤道)의 스콜에 광휘(光輝)를 뽐내는 이름 모를 청람색(靑藍綠)의 꽃들. 그들의 정열, 그들을 닮아 햇살은 더욱 광포하게 내리꽂힌다. 적도(에콰도르, Equator)의 나라 한 복판에 내가 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그날까지 이러한 감동, 인상, 정념에 사로잡힐 순간이 과연 얼마나 더 있을 것인가. 이 순간이여 영원히. [2001. 1. 28. 일] 2021.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