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땅 (2/2)/육질(肉質)은 탈골(脫骨)이 되어 땅에 흘러내려 흙의 성분으로 화하는 모습도 보았다
청솔고개
2020. 4. 28. 10:10
흙과 땅 (2/2)
청솔고개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가까운 공원을 뛰거나 산책을 하면서 땅을 밟는다. 직립보행이란 인간의 원리대로 생활하니 몸은 더욱 가벼워지고 마음은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나는 뛰면서 주로 땅을 쳐다보고 땅과 대화한다.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소금강산 너머 성지골이라는 샘터에 소풍 삼아 물을 길러 간다. 철따라 샘터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봄에는 정겨운 진달래, 화사한 산수유, 여름엔 애틋한 달맞이꽃, 가을은 억새꽃, 겨울은 솔숲과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천년의 바람이 나를 유혹한다. 특히 봄철, 4월쯤에는 샘터가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은 거의 환상적이다.
몇 년 전 산불로 키 큰 나무들은 모두 넘어져 있어 마치 태산준령이 고사목(枯死木)을 보는 듯하였다. 일부는 검게 타들어 가고 일부는 썩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 무척 흉물로 보인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인간들의 실수로 인한 산불로 멀리서 보면 보기 싫을지는 모르나, 가까이 가서 그 현장을 단 몇 분만이라도 관찰해 보라. 놀라운 변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로 혹은 세로로 검게 넘어져 썩어 들어가고 있는 그 부근에는 키 크고 생존력이 강한 소나무와 같은 수종이 사라진 사이에, 진달래, 오리나무, 떡갈나무 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움과 싹을 틔우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지 않는가? 참 역설적이게 만약에 산불이라는 변수가 없었더라면 이런 키 작은 떨기나무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랑이나 하듯이 자랄 수가 있을 것인가. 땅은 이렇게 인간들의 실수로 인한 큰 재앙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섭리대로 위대한 새 생명체를 생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이 주는 가장 위대한 이법(理法)이요 질서다. 지구 물리학에 ‘가이아’이론이라는 게 있다. ‘가이아’는 고대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란 의미인데 이 지구는 그냥 단순한 무생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년 엄습하는 태풍은 지구가 재치기하는 것이고 지구를 둘러싼 물은 대지에 작용하여 인간이 만연시킨 온갖 독소라고 언젠가는 자정(自凈)하여 원래의 상태로 환원시켜 놓는다는 이론이다. 땅은 이처럼 위대한 섭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게 없고 죽어서 썩음이 없다면, 우리 대지는 어떤 모습을 할까? 우리들의 주검은 도처에 마치 동태처럼 피둥피둥 썩지 않고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땅은 인간의 이러한 추한 모습을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원래 모습대로 환원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소금강산 너머 산 불난 곳에도 이러한 아름다운 땅의 썩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왕성한 회복 탄력성을 보이고 있다. 개미를 비롯해서 이름 모를 벌레들이 타서 넘어진 나무 등걸에 달라붙어 열심히 아름다운 썩음을 재촉하고 있고, 벌써 육질(肉質)은 탈골(脫骨)이 되어 땅에 흘러내려 흙의 성분으로 화하는 모습도 보았다. 옛날 지관(地官)들은 명당의 조건으로 시신이 빨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리를 꼽았다. 우리는 땅의 이 아름다운 썩음에서 인간의 도리를 체득(體得)해야 할 것이다.
나는 도시 한 가운데 그래도 몇 그루의 나무라도 심고 살 수 있는 내 땅에서 단독으로 지은 주택을 갖고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우리 집 작은 뜰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나무 식구들을 바라보노라면 다른 데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그러나 아직 전답이 있는 고향 땅의 붉은 황토 질흙으로 유별난 언덕에 토담집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 완당의 세한도에 나오는 토담집 같은 것 말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인간들의 마음의 부패에서 풍기는 악취는 피하고 아름답게 썩어 가는 흙과 땅이 살아 숨쉬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을 다하고 싶다. [위의 글은 2002년 봄에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