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우리 집안 안어른 네 분 이야기 1, 할머니 회상/내가 까맣게 안 보일 때까지 훠이훠이 손을 흔들며 이 맏손자를 배웅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솔고개
2021. 2. 28. 22:49
우리 집안 안어른 네 분 이야기 1, 할머니 회상
청솔고개
매년 이즈음, 2월 말, 졸업시즌이 되면 유난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평생 내 곁을 지켜 주실 것만 같았던 우리 집안의 안어른들이시다. 할머니, 막내 종조할머니, 어머니, 숙모 네 분이시다. 나의 대학 졸업식에 이 네 분은 아버지와 함께 멀리 고향에서 직접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사진도 같이 찍었었다. 이분들이 내가 다니던 대학 졸업식 현장 참석에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 졸업식 날 일정상 이 손자가 대학 다니면서 3년 가까이 몸담아 활동하고 생활했던 야학 기숙사까지 모시고 가게 되고 기숙사 여러분들께 인사까지 드렸던 추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이는 내 생애 몇 안 되는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먼저 할머니에 대한 회상이다. 아직 겨울 방학 중이었던 어느 날, 우리 내외가 오랜만에 시간 내서 큰집에 갔는데 할머니께서 새벽부터 몸이 좀 안 좋다고 하셔서 어머니 부탁도 있고 해서 이 맏손자가 택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다. 가벼운 증상 같긴 하지만 내가 부축하려니 “야야, 개안타. 혼자 갈란다.”하신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진료 받으러 당신이 직접 걸어서 들어가시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의사로부터 환자가 위중 상태니 가망이 없다고 하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믿어지지 않았다. 집에 모시고 가시든지 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때만 해도 장례식을 병원 장례식장에서 하는 건 활성화돼 있지 않고 그 병원을 비롯해서 인근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 임종은 반드시 집에서 해야 한다는 인식밖에 없었던 것이다. 살던 집 아닌 다른 공간에서 임종을 맞이하면 객사(客死)라고 해서 집안에서고 망인에게도 있을 수 없는 상태로 치부(置簿)하였기 때문이었다. 집에 연락한 후 의식이 없으신 할머니를 바로 모시고 왔다. 평소 기거하시던 사랑방에서 누이셨다. 평생의 반려자 할아버지께서 조용히 지켜보시는 가운데 30분 만에 운명하시었다. 내가 성인이 돼서 가족 중 직계가 운명하시는 걸 임종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깊은 잠에 빠지듯이 평온하게 가셨다. 그야말로 영면(永眠)에 드신 것이다. 지켜보시던 할아버지는 쓸쓸하신 표정으로 “니 할미가 새벽부터 일어나 남 잠도 못 자게 낭자머리를 빗고 하면서 수선을 떨더니 결국 오늘 갈라고 그랬나보다.”하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그 순간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개안타.”하시던 그 말이 이승에서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은 진정 몰랐다.
19살 할머니는 14살 할아버지와 혼인하셨다. 5년 연상이었다. 시집와서 농사꾼의 아내로 평생 큰소리 한 번 내는 법 없으셨고, 평소에는 옆에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신 분이셨다. 어찌 보면 당신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거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냥 침묵 상태로 평생 사신 건지도 모른다.
우리 할아버지는 삼형제 중 맏이였다. 그러니 우리 할머니는 맏동서였다. 할머니는 지나치게 자기를 낮추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말재간 앞세워서 없는 말도 지어내던 바로 밑의 동서, 그러니 내게는 첫째 종조할머니한테는 늘 당하기만 했다고 가끔 푸념하시는 것을 들었다. 가부장제에 곁들인 지나친 시집살이 경쟁구도였던 그 시절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둘째동서, 그러니 내게는 막내 종조할머니는 말뿐만 아니고 음식솜씨, 집안 대소사 주도하는 장악력, 추진력에서 위 두 동서를 압도해서 맏동서인 할머니는 늘 떼밀려 가는 듯 한 인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할머니는 그냥 묵묵히 농사 거들고 살림 무섭게 사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던 분이었다. 당신한테는 증손녀인 나의 첫 아이가 났을 때, 20리 가까이 되는 우리 집까지 자주 걸어서 오가면서 증손녀를 귀애하시던 각별한 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바로 밑 내 동생이 나서 내가 얼마동안은 할머니가 계시던 큰집에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간 동안 할머니하고 너무 정이 들어 나중에 부모님이 큰집으로 들어와 합가했을 때, 내가 부모님 방에 자다가 밤에 소스라치게 놀라 울면서 부모님 기거하던 방에서 나와 대청을 건너 할머니가 계신 큰방으로 종종걸음 치며 달려갔던 기억이 새롭다. 할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다가 울면서 잠 들곤 했다.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때 할머니 연세는 불과 마흔 여섯이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했을 것 같다.
간고(艱苦)의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해방 직후 몰아친 좌우익 갈등 국면, 이어서 돌발한 한국전쟁의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 할머니는 내게는 백부님이 되시는 큰아들마저 잃게 되신다. 그런 남편 때문에 우리 백모님은 슬하에 혈육하나 없으시다가 결국 내가 국민(초등)학교 2학년인가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갑자기 안 보이셨다. 내가 어린마음에도 급하게 “큰엄마는?”하고 정든 큰엄마 부재에 대해서 물었지만 잘 대답주시지 않았다. 그 후 그런 사실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니 큰엄마는 팔자 고치러 가셨다.”고. 즉 개가(改嫁)하신 것이다. 이런 풍파에다 당시 마을 구장(현 이장)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낮에는 근처 지서의 경찰이 와서 뺄갱이 동태 제보에 추궁, 위협당하고, 밤에는 산 손님의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면서 좌우익 양쪽의 틈바구니에서 고초를 겪으셨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바른 말하지 않는다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이로 인해 노년에 할아버지께서 다리와 발의 신경통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다가 심지어 다 큰 쥐를 벗겨서 추녀에 걸어 말려 고아서 약으로 드시거나 아니면 빨간 쥐새끼도 삶아서 약 된다면서 잡수시던 건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토록 우리 할머니는 평생 마음고생깨나 하신 걸로 기억된다.
나의 영유아기 시절은 이렇듯 맏손자로 각별한 대우와 주목을 받고 보낸 것 같다. 나의 자존감, 정체성도 이 때 다 형성되어 지금까지 그것으로 버티어 온 것 같기도 하다. 생전에 우리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잊어지지 않는 것은 “니가 맏손자로 태어나서 집안의 경사였지만 처음부터 너무 약하게 태어나고 게다가 니 에미 젖이 부족해서 암죽을 해서 먹인다, 뭐를 먹인다 해서 마음이 아팠다. 니 에미한테는 젖 잘 난다던 까마귀 고기 삶아서 먹이기도 했다”고 하신다. 또 손자가 너무 애중하신 나머지 “내가 니를 업고 가다가도 신기하기도 하지만 너무 약해서 고개 돌려 한 번씩 너를 보면서 니 손을 꺼내 만져 보면 애 손이 아니라 마치 *뛰지기 손 같더라. 니 손이 너무나 작고 약해서…….”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 가족은 시내로 나오고 농사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근처 시골 큰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와 평생 쌓은 정이든 나는 자주 큰집을 찾아뵈었다. 대략 하룻밤 정도 묵고 할머니께 하직 인사드리고 큰집을 나설 때마다 언제나 할머니는 사립문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해 주신다. 맏도랑 가는 왼편 섯갓밑 언덕배기 모퉁이 지나 새들 논길까지 멀어져 내가 까맣게 안 보일 때까지 훠이훠이 손을 흔들며 이 맏손자를 배웅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우리 할머니의 나이에 내가 벌써 접어 들었는데 난 이제 너무나 멀리 있는 네 살 먹은 외손자는 아직 그런 철이 들 나이는 한참 멀었고 아무래도 친손자는 그럴 가망이 없어서 좀 쓸쓸해진다.
사람이 한 생애를 마감한다는 것이 평생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먼저 가신 분을 떠올려 보니 한 존재가 떠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천착(穿鑿)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존재가 막상 나일 때 모든 것은 어찌 될까. 2021.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