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정월 대보름/들판이나 밭둑에서는 소똥이나 헌 고무신짝을 넣은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을 붙이고 끈을 달아서 휘휘 돌팔매 하듯이 돌린다

청솔고개 2021. 3. 3. 00:30

정월 대보름

                                                       청솔고개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문득 내 어린 시절, 그 흥성하던 축제의 장이 그립다.

   내 초등학교 시절, 정월 대보름 새벽 풍경이다. 이날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할배는 늘 내보고 대나무 숲 울타리에 가서 새를 훝으라고 명하신다. 그래야만 올해 풍년이 된다는 거다. 이 풍속은 우리 집에 오랫동안 내려오는 세시 풍속의 하나다. 새벽 두터운 대나무 숲은 무서웠다. 뭔가 꼭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우리 농사가 풍년이 되어야 한다는 일념에 정말 한 삼십분 정도 후여후여 하고 목청 돋워 새떼들을 훝던 기억이 난다. 그 짙고 깊던 대숲 울타리가 그립다.

   정월 대보름 날 저녁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멋진 축제의 장이다. 오후 4시가 되면 벌써 동네 장정들은 쉼산, 숨메산, 솥뚜방산에 올라서 달집을 만든다. 마을의 성급한 꾼들은 이미 목갱이와 수굼포, 가래를 가지고 가서 깊이 구디를 파고 나무를 잘라 포갠다. 서슬 퍼런 산림보호책이 시행될 시기였지만 이때만은 축제라 모른 체 했는가 보다. 평소에 만약 집의 나무배까리에 소깝단이라도 면직원들 눈에 띈다면 지체 없이 산림법을 적용해서 벌금을 매기는 거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드디어 달이 얼굴을 내민다. 모두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비장하고 경건한 얼굴이 되어 합장하면서 연신 달을 보고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 때 대보름달님 보고 뭘 빌었던가. 이제부터 대보름달님을 맞이하는 흥성한 의식이 시작된다. 이때만큼은 사방을 둘러보면 높은 산 낮은 산 할 것 없이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여러 군데 달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을마다 ‘달 보오……!’ 외치는 소리에 달집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연기 사이로 보름달은 더욱 둥두렷이 솟아오른다. 반가운 얼굴이다.

   축제는 지금부터다. 우리는 일찍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다시 나와 밤새도록 온 들판과 산 밑 밭둑, 골목길을 미친 듯이 싸돌아다닌다. 들판이나 밭둑에서는 소똥이나 헌 고무신짝을 넣은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을 붙이고 끈을 달아서 휘휘 돌팔매 하듯이 돌린다. 그러면 마치 횃불처럼 불춤이 너울거린다. 논둑 밭둑에는 벌써 불기운이 많이 지나간 듯, 달빛 아래 연기가 피어오른다. 달빛 아래 훨훨 불이 타고 있는 논둑이나 강둑은 마치 생명의 약동을 바라보는 듯하다. 온 들녘이 바야흐로 불꽃 축제다. 불이 붙은 헌 고무신 쪼가리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는 말만 들었던 표범이나 호랑이 눈알에서 척척 흐르는 안광 같다고나 할까. 그 불덩이가 철철 넘쳐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박수치고 환호하고 미친 듯이 고함친다. 일대 장관이다.

   우리 장골 밭에는 새삼이 많아서 할아버지는 정월 대보름 아침밥을 먹으면서 귀발개를 씹을 때면 해마다 “올해도 새삼 밭에 불이여! 해야 재!”라고 하셨다. 우리는 더욱 신이 나서 밭 가 감나무, 뽕나무 주위를 빙빙 돌면서 ‘새삼 밭에 불이여, 새삼 밭에 불이여!’하고 주문을 외듯 고함을 친다. 온 들판과 산골이 온통 불꽃 축제다. 자정이 다 되어 가면 사위의 불꽃도 사그라들고 이따금씩 퍼런 불꽃이 바람에 휙휙 날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누군가가 토째비 불이라고 잘 아는 듯이 말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기세는 금방 꺾여든다.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슬금슬금 꽁지내린 강아지가 되어 주섬주섬 한참 뛰어서 데워진 몸을 식히러 벗어 놓은 옷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중천에 떠 오른 달이 교교히 겨울밤 길을 비추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유년, 정월 대보름 밤은 깊어간다. 2021.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