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말, 마음, 감정 4/ 우리의 감정 표출 방식은 이렇게 사소하며, 불안정하며, 불합리하며, 마치 럭비공 튀듯이 예측 불허이며, 그래서 얇은 얼음장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롭다

청솔고개 2021. 3. 7. 02:43

말, 마음, 감정 4

청솔고개

   하루는 아내와 같이 모처럼 살짝 들뜬 기분으로 나들이를 출발했다. 모처럼 봄비도 촉촉이 내리는 날 아내는 드라이브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살짝 설레기도 한다. 목적지는 인근 5일 장이다. 장 보러가면서 셀프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는데 주유기의 카드 인식 기능에 오류가 있어서 좀 머뭇거리면서 지체했었다. 나는 셀프 주유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잠시 다시 해 보면 될 것 같아서 두어 번 시도했는데 결국 안 된다. 시간이 지체되니 아내가 기다리다가 차 문을 열고 뭐라고 주문한다. 나는 그 주문한 내용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으레 그 말이 그것도 제대로 못하느냐, 안 되면 또 그리 있지 말고 빨리 연락하라면서 나에게 짜증을 내거나 답답하다는 듯이 화내는 말로 들었다. 들으나 마나 필경 나를 다그치고 비난하는 말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내가 너무 건성으로 들은 것이다.

   그 순간 나도 짜증이 더 솟구쳐서 문을 꽝 닫으면서 큰소리로 제발 자꾸 그렇게 깝치지 말라는 식으로 쏘아붙여버렸다. 좀 있으니 연락 받은 주유원이 와서 잘 처리해 주었다. 이러면 일단락 된 것인데 아내는 또 아까 내가 한 말을 곰씹어가면서 나무라고 비난한다. 나도 아내의 그 말버릇을 그대로 답습한다. 내가 또 아내의 말꼬리 물고 ‘같은 말 자꾸 리바이벌한다.’고 반박한다. 아내는 자신이 딱 한 번만 말했을 뿐인데 내가 반복의 뜻으로 ‘자꾸’란 말로 윽박지른다고 화를 낸다. 나는 또 이번은 한 번이지만 이런 상황만 되면 늘 그래왔으니 자꾸 반복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악순환이다. 이런 말싸움 습관이 물론 나에게도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누가 비난하거나 힐책해도 그냥 쉽게 잘 넘어 갔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버럭’하는 증세가 도진다. 막상 그 상황을 지나서 돌아보면 내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고 어른답지 못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릴 때도 많았다.

   아내는 이렇게 된 이상 드라이브 삼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려했던 오일장 가기는 정말 싫다고 한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한다. 이게 아내의 전형적인 응수다, 내가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자칫하면, 틀어지면 막무가내로 뭐 안 하겠다. 못 하겠다. 집에 돌아가겠다.”는 식의 대응이라고 몇 차례 일깨워주었는데도 반복된다. 어린애 같은 이런 떼쓰기는 정말 나를 화나게 한다. 오늘도 결국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가기 싫으니 바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내가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가다보면 기분이 좀 누그러질 테니 한번 가보자 하니 아내는 급기야 차를 세워달라는 것이다. 내려서 혼자라도 집에 가겠다고 한다. 다시금 내가 이런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면 더 나빠질 테니 가면서 풀어보자고 달래어가면서 7.80리 떨어진 오일장에 인근까지 갔다.

   그런데 다 가서는 길을 잘못 들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이른 초봄 치고는 세차게 내리는 날씨로 시야가 흐린데다가 새로 훤히 뚫린 도로가 낯 설어서 그런 것 같다고 지나가는, 혼잣말로 해 본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것을 시종일관 침묵하는 아내에게 해명한다는 것이 이미 스타일이 구겨지고 자존감도 살짝 내리 앉는 것 같았다. 뭣보다 이미 불필요한 분노표출로 흥분상태가 지속되고 멘탈 소진으로 판단의 오류가 발생한 것 같다.

   급기야 장터까지 가긴 갔지만 허망하게도 폭우로 장은 아예 서지도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비게이션 작동만 믿다가 아무런 매력도 없는 복잡한 길로 10킬로나 빙 둘러오게 되었다. 이는 아마 내비게이션의 경로옵션이 문제일 것 같다. 남은 하나 마지막 실수는 더욱 가관이다. 아내가 마지막 방안으로 이런 굳어진 분위기를 해소할 명분 제시를 해왔다. 이왕 이쪽 길로 접어들었으니 인근 떡방앗간에 가서 찰보리떡 을 사가자고 한다. 마지막 기회를 포착한 나는 너무 긴장해서 혹시 뻔히 아는 가는 길도 잘못 들까 싶어서 내비게이션 설정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를 잘못 판독해서 또 지나쳐 버렸다. 첫 경로이탈부터 아내는 조수석에서 내내 “푸푸”하면서 화를 삭이고 있다가 끝까지 그 소리만 낸다. 처음 잘못된 단초로 인한 꼬임의 연속이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되었는가. 그 주유소에서 첫 단추를 정말 잘 못 끼운 것 같다.

   집에 와서 아내가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가 이렇게 사사건건 자주 감정이 격돌하니 근본 해결책이 뭘까 한번 심도 있게 논의해 보자.”고 한다. 나는 아내한테 이런 말이 떨어지면 곧 이는 화해의 증좌임을 지난 경험으로 잘 안다. 나는 이런 답을 준다. 나의 노령의 남성 호르몬 불균형으로 여성화에 대한 처방, 심리 상담 등으로 정면 돌파하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정 표출 방식은 이렇게 사소하며, 불안정하며, 불합리하며, 마치 럭비공 튀듯이 예측 불허이며, 그래서 얇은 얼음장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롭다는 인식을 제대로 가지기만 해도 해결될 것이다.   2021.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