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3월의 스키 장 2/ 방한복 안에 땀이 흥건히 배여 있는 체로 그냥 눈발에 벌렁 드러눕고 벌컥벌컥 캔 맥주를 까서 들이켰다
청솔고개
2021. 3. 10. 01:34
3월의 스키 장 2
청솔고개
그때 내가 스키에 도전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미 1년 전에 스키에 입문해서 한창 빠져들어 있던 후배 교사 하나가 세상에 이것만큼 판타스틱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스키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찬사와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듣고 바로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 후배교사는 자기와 같이 스키 배우러 간 사람 중에서는 담력이 부족해서 도중에 배우기를 포기하는 경우를 보았다면서, 누구나 스키를 마스터할 생각이 절실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않도록 애초에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손쉽게 되돌릴 수 없도록 스키 배우기에 애초부터 과감한 투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자기가 쓸 스키 본체와 부츠, 폴대 등을 사전에 구입해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성향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도중에 포기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확실히 그렇게 해야 스키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뜻을 둔 몇몇은 서둘러 스키 마스터 모임을 결성하고 단체로 스키와 부속 장비를 일체를 구입해 버렸다. 나도 구입해버렸다. 나는 구입한 스키 장비로 한 달 전부터 거실 등 넓은 곳에서 틈나는 대로 부츠 신는 법, 부츠를 스키에 장착하는 법, 탈착하는 법, 스키 장착하고 일어나는 법,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 등을 수시로 연습하곤 했다. 이런 연습을 통해서 실제 스키장에 가서는 더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충고에 따른 것이다. 거실 바닥에서 둔중하기 짝이 없는 부츠를 신고 내 키의 절반이 넘는 스키를 다루려니 만만치가 않았다. 처음엔 스키 장착해서 발을 쳐드는 것도 힘들었다. 스포츠나, 음악, 미술, 혹은 잡학 등 어느 분야에서에서도 제대로 내세울만한 나는 이것을 통해서 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미리 연습을 했다.
드디어 스키장 갈 날짜가 다가와서 일행은 함께 무주스키장에 갔다. 스키 지도 후배 교사는 시즌에 본인이 자주 갔던 숙소로 안내했다. 당시는 무주리조트가 조성되고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직후여서 스키 등 각종 동계 스포츠에 관심이 있었던 때였다. 스키장의 숙박 시설은 부족했었다. 당시 아직 깊은 산골이었던 덕유산 산자락의 스키장 인근 농가는 동계시즌만 되면 민박을 개설해서 스키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은 그냥 시골집으로 소박했다. 산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민박집은 넉넉한 인심과 호남 지역의 독특한 청정 음식 맛을 제공했다.
도착한 그날 오후에 장비 랜탈하는 번거로움 없이 가져간 나의 스키를 신고 실제 눈밭에 들어가 보았다. 모두들 후배교사에게 간단한 강습을 받았다. 아래 평평한 눈밭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산꼭대기 출발 선상에서 시원한 스피드로 날렵하게 활강하는 스키어들의 모습 그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스키장 설원은 별천지 같았다.
야간에는 난생 처음 리프트를 타고 초급코스 슬로프 상단까지 올라갔다. 리프트 타는 것도, 부드럽게 내리는 것도 무척 긴장이 되었다. 리프트를 타고 천천히 오르는데 어둠을 밝히는 휘황찬란한 조명, 그 조명이 또 흰 설원을 더욱 황홀하게 밝혀 주었다. 설원의 밤을 홀릴 듯 한 매혹적인 음악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젖는 것은 여기까지다. 흥겨움과 낭만은 끝, 고난 시작이다. 드디어 내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야 한다. 생전 처음 경험이다. 슬로프 상단 출발지점에서 보니 조명은 더없이 밝은데 마치 산사태처럼 깊게 깎여 나간 슬로프 아래를 보니 아찔했다. 일단 뒤뚱거리며 난생 처음 미끄러져 본다. 허나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한다. 가까스로 턴할 지점까지 가서는 그대로 넘어지고 자빠진다. 일단 나뒹굴고 나면 긴 스키를 딛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처음에는 10초미만을 기록하였다가 약간씩 버티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긴 하였지만 결국 널브러져서 낑낑대며 용을 쓰다가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강 코스는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다. 속도를 못 이겨 이 구석에 처박히고 저 골에 고꾸라지기, 다시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최초로 한 번 아래까지 내려오는데 30분도 더 걸린 것 같다. 수십 번 처박힘, 고꾸라짐, 나뒹굼으로 더러는 스키가 부츠에 빠져 달아나 이를 수습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중에 다 내려와서 내 방한스키복에는 눈 더미와 얼음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서 털어내야 할 지경이었다. 목이 바짝 마르다. 이 모든 상활을 한 시즌 먼저 겪었던 후배 교사가 아래로 다 내려와서는 갈증과 땀으로 범벅이 될 것이니 그럴 때는 그냥 드러누워서 캔 맥주 한 잔 안 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조언에 따라 나도 그리했다. 나도 방한복 안에 땀이 흥건히 배여 있는 체로 그냥 눈발에 벌렁 드러눕고 벌컥벌컥 캔 맥주를 까서 들이켰다. 속이 확 뚫리고 정신이 번쩍 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러한 음주 스키는 자칫 사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가 참 무식하고 무모했구나 하는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내 생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처절하게 차가운 눈발에 뒹군 적이 있었던가. 초보 스키어의 30년 전의 생애 최초 하강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21.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