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3월의 스키 장 4/ 가장 큰 가르침은 제대로 일어서려면 잘 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법부터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솔고개
2021. 3. 11. 00:17
3월의 스키 장 4
청솔고개
그 다음은 우리 가족에게 스키를 전파하는 것이다. 이른바 스키 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 세상 멋진 체험을 즉각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아이들에게 화려하고 멋진 스키복부터 사 입혔다. 당시 최고급 브랜드였다. 이것은 즉각적이고 전격적인 동기유발책이다. 아이들은 황홀해 했다. 자존감이 훅 자란 것 같았다.
우리 두 아이들은 오전 한 나절만 연수하니 오후엔 신기하게도 혼자서 잘도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그냥 작은 공이 미끄럼을 타고 또르르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나처럼 넘어지고 자빠지지 않는다. 뒹굴지도 않는다. 아직 초등 저학년이라 작은 체구가 오히려 스키 배우는 데는 훨씬 안정적이고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날은 자유자재로 리프트를 선택해서 즐긴다. 아이가 어디 가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이 둘은 그해 겨울 시즌 중 스키장 두어 차례 다녀온 뒤, 벌써 나보다도 더 안정적으로 스키를 탈 줄 알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권고한 여러 생애 프로그램에서 이 스키 조기교육이 품질 면에서 단연 1순위로 된 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공통된 평가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스키 시즌만 되면 최소 두세 번 정도는 꼭 스키장을 다녀오곤 했다.
아내에게도 스키 장비 세트를 구입하게 했다. 이후 우리 가족은 모두 스키 마니아 가 되었다. 그 동안 세월이 흘러 무주 스키장 주변 풍경도 많이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호남 지역의 푸근한 산골인심을 내주던 그 민박집하고는 끝까지 인연을 같이했다. 이 모든 인정스러움은 공동샤워장 사용, 외풍이 심해 허옇게 입김이 서리는 시골 방, 좁은 마당이나 가파른 골목길 주차의 불편함마저 훈훈하게 덮어주었다. 끼니때마다 내 놓는 지역의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밥반찬은 물론이거니와 떠나올 때는 주인할머니가 산나물, 버섯, 호박 말린 것을 챙겨주시는 것이었다. 그 인정의 다사로움이 마치 시골 고향집을 다녀간 자식에게 베풀 듯이 대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들릴 때마다 맛난 빵, 풍성한 과일을 준비해서 답례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나중에는 한 가족처럼 대했다.
한편 해마다 시즌에는 스키 장을 오가면서 많은 걸 겪었다.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를 듣고도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 짜릿한 스피드 감을 잊지 못해 무리하게 가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눈길에 미끄러져 길가 도랑에 처박힌 차량, 뒹굴다가 뒤집혀 부서진 차량이 가는 데마다 즐비한 경우도 보았다. 이걸 보면서 나는 옴찔옴찔 오금이 저렸었다. 언젠가는 폭설로 길이 미끄러워 도중에 스노 체인을 감았는데도 도저히 스키장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되돌아오면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합천해인사니, 남해안 쪽으로 겨울 여행을 간 경우도 있었다. 눈 없이 평온한 남해안은 별로 성에 차지 않았다. 여행 기간 내내 다시 스키 타러 갈 수는 없을까 싶어 일기예보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던 적도 있었다. 다음은 그 최악의 경우다. 스키를 느긋하게 즐기고 오후 5시쯤 귀가하기 위해서 출발하는데 눈발이 살살 날리기 시작했다. 좀 걱정은 되었지만 내일 일정이 있어서 그냥 출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운 눈발은 대설경보 급으로 퍼 부어서 평소에는 3,4시간만 하면 도착하는 집에 무려 17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다.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에서 밤새도록 거의 움직이지 못했었다. 나중에는 고속도로에서 모든 운전자들이 지친 나머지 그냥 1, 2분씩 혹은 2, 3분씩 잠이 살포시 들었다가 뒤에서 울리는 경적이나 번쩍거리는 헤드라이트에 잠이 깨서 다시 시동 걸고 출발하기를 반복했던 적도 있었다.
남에게 내세울 게 별로 없는 나로서는 가족과 함께한 이 스키 체험은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멋진 선택이요 큰 행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 살아오면서 영하 10도나 되는 설원의 한밤을 뜨거운 열정 하나로 몰입할 수 있게 스스로를 내 몬 그때를 떠올리면, 삶의 고비에서 다가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은 이로 인해 조금은 해결하고 이겨낼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가파르고 굴곡진 슬로프, 다양한 한계상황을 통하여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삶의 소중함을 체득할 수 있었으리라 내가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가르침은 제대로 일어서려면 잘 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법부터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균형과 유연성, 홀로서기는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설원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제 설원에서의 그날들은 다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 눈발처럼, 백설처럼 뜨거웠던 그때 그 시절로 한번만이라도 돌아가 보고 싶다. 다만 연암의 이 말이 이제는 실감이 된다. 2021.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