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단상/ 꽃이 피는 사월이 손을 흔들며 내 생애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월의 단상, "가장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언젠가는 이른 봄 날 새벽, 연분홍 꽃봉오리가 터 오름을 보고도, 늦은 봄날, 한 떨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도, 아무런 가슴 설렘도, 가슴 뜀도, 슬픔도, 애연함도, 어떤 감성도 모두 상실하게 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리라."
청솔고개
꽃이 피는 사월이 손을 흔들며 내 생애에게 작별을 고한다, 올봄에도. 아흐레째, 여덟 밤을 병원 보조 침상에서 잤다.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내 한 몸 누일 터가 반의반 평도 필요치 않음을 깨닫는다. 일백 근도 안 되는 내 육신을 건사하는 데는 거나한 만찬도 소용없고, 하루 한 끼는 반 공기 밥, 고구마 몇 개, 토마토 한두 개면 족하다. 밤을 새우며 두 세 시간 수잠으로도 생활이 유지됨을 안다. 이 봄이 짙어 가도록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별일 안 생기고, 같이 술 한 잔 안 마셔도 견딜 수 있음을 안다. 산 속의 삶도 이런 걸까. 내 몸을 쬐는 한 뙈기 봄 햇살만 있으면 족하다. 우심해지는 심신 허약으로 현실 감각이 전혀 없어 투약과 영양 공급 위해 코 줄 달고, 팔다리 고정된 지도 아흐레……. 우리 아버지. 밤을 새우면서 이를 지켜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절대 금식 선고로, 타는 목마름에도 입안 적실 물 한 방울 못 축여 드리고, 내가 밤새 지켜볼수록 이상하게 더욱 담담하고 차분해 지는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을 확인하게 된다.
집 나서서 산길로, 들길로 꽃을 찾아 떠나고, 꽃그늘에 숨어들 수 있음이, 아니, 그런 로망이 얼마나 고급적이며 호사한 삶의 행태인지 알게 된다. 이 사월에 만난 단상들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서 혹은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으며, ‘이름 없는 항구에 서 배를 타’고, ‘빛나는 꿈의 계절’을 구가하고 싶은 열망.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는 열망. 해질 무렵,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려는데, 문득 서녘 하늘 아래 아득한 옥녀봉은 어리비치는 풍진만리길. 밤길을 걷는다.
바람이 분다. 땅에 깔린 꽃잎들이 우르르 나를 따라 온다. 수 만 마리의 흰 나비 떼.
내가 내 생애에서 가장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언젠가는 이른 봄 날 새벽, 연분홍 꽃봉오리가 터 오름을 보고도, 늦은 봄날, 한 떨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도, 아무런 가슴 설렘도, 가슴 뜀도, 슬픔도, 애연함도, 어떤 감성도 모두 상실하게 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리라. 2020.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