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가고시마 기행 제 3일/ 멀리 보니 하늘 밑 사쿠라지마 화산 위는 온통 운무(雲霧)로 덮여있다. 하늘인지 구름인지 산인지 구분이 안 된다
청솔고개
2021. 3. 16. 13:49
가고시마 기행 제 3일
청솔고개
2018. 3. 16. 금. 비
여행 마지막 날. 아침부터 비가 온다. 여행이니까 비 오면 오는 대로, 가고시마 봄비를 맞아보는 것도 새로운 체험이라는 인솔자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활화산(活火山) 사쿠라지마 완전정복’이라는 스케줄로 기대가 크다. 역시 8시 반에 출발. 활화산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 이번엔 배에 버스를 싣고 접근했다. 15분 정도 걸렸다. 두 반도 사이 내해로 형성된 만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특이한 체험이다. 비가 제법 세차게 내린다. 아무래도 짙은 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활화산의 전경을 자세히 보는 게 어려울 것 같았다. 근처 입구에서 족욕(足浴)을 간단히 하고 활화산 전망대로 걸어갔다. 말끔히 닦여진 진입로 밖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멀리 보니 하늘 밑 사쿠라지마 화산 위는 온통 운무(雲霧)로 덮여있다. 하늘인지 구름인지 산인지 구분이 안 된다. 홋카이도의 노보리베츠처럼 연기외 열기가 뿜여져 나오는 화산 입구까지 답사하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섬 밖에서보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멀찌감치 전망대 같은 데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쁜 일기로 이마저 무산되어버려서 좀 허망했다. 그냥 잘 정돈된 탐사 길만 우산 쓰고 걷다가 올 뿐이었다. 활화산 근처의 유황 냄새와 화산 연기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 가이드는 오늘은 비가 와서 유황냄새도 화산재가 없어서 좋다고 말하지만 나는 화산지대에 오면 화산재든 뭐든 그 체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비 때문에 아무것도 체험할 수 없었다. 이번엔 그걸 볼 운이 없는 거라고 생각할 밖에 도리 없다. 뭐, 삼대에 걸쳐 덕을 닦아야 볼 수 있다는 식의.
12시에 전망대에서 일행의 전체 사진 찍고 떠났다. 떠나올 때는 원래는 섬이었던 사쿠라지마가 화산 폭발로 메워져서 육지로 연결되다보니 자연스레 도로가 난 쪽으로 해서 나왔다.
이렇듯 자연의 힘은 지형을 한 순간에 변형시켜 없던 길도 만들 수 있게 한다.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보면 모든 인간 삶의 바탕은 한 순간의 대폭발로 생성된다. 중국 쓰촨성의 문천(汶川)과 무현(茂縣) 인근의 접계해자[疊溪垓字 첩계해자]도 1933년 진도 7.5의 강진으로 민강(岷江) 골짜기가 막히고 5개 마을이 수몰된 뒤 생성된 것이다.그 사이 비가 그치고 날이 말끔해진다. 멀리서 보니 사쿠라지마가 한층 산뜻하게 드러난다. 화산 바로 밑에서는 운무로 화산 그림자도 못 보았는데 아이러니컬하게 멀리 떠나오니 전경이 보인다.
12:30, 다음은, 흑초관(黑醋館)이라고 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식초(食醋) 제조 공장 방문이다. 문득 우리네 식초 제조법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마시고 남은 탁주(濁酒)를 그냥 두면 시어져서 자연스럽게 초가 되가 되는 걸 자주 보았다. 어른들은 음식에 이 초를 넣으면 가장 맛이 잘 난다고 했다. 큰 호리병 모양의 옹기초병(醋甁) 근처에 가면 아주 시큼한 식초 냄새가 났었다. 이래서 흔히 술에 절어 사는 사람을 초병이라고 부르던 것도 떠오른다. 이것을 꾸며서 관광코스로 만드는 솜씨가 역시 일본답다.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도 흐릿한 사쿠라지마의 산머리에서는 여전히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점심 먹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한다. 공항 면세점에서 아내가 부탁한 립스틱이 있어서 구입했다. 그런데 항공사에서 나에 대한 대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우선 내 파손된 캐리어를 비닐로 포장해 주고 좌석도 맨 앞좌석인 3번으로 배정해 준다. 내 캐리어 파손에 대한 손해를 배려해 주는 차원인 것 같다.
어느새 이륙했다. 가고시마 반도의 오후가 들녘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여기 언제 다시 오랴? 그러니 나는 어떤 여행지이든 떠날 때 더 뒤돌아보아진다. 늘 아쉬움이 가슴에 꽉 찬다. 누구는 뒤돌아보고 미련도 갖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 잘 안 된다.
바로 우리 한반도 자락인 듯하다. 올망졸망 섬과 산들이 구글어스 지도 모양 그대로다. 인천 공항에 안착했다. 정해진 차 시간에 쫒기는 둘은 서둘러 먼저가고 남은 사람들은 밥을 같이 먹었다. 나는 예약한 저녁 9시 30분 하행 공항버스에 올랐다. 이번 2박 3일의 여정은 참 조촐하고 담백했다. 가볍게 차린 국밥 한 상 같은 느낌이다. 기간이 짧은 만큼 그 아쉬움도 진하고, 감성이 초점으로 모아져서 여행에 대한 기억은 더욱 뜨겁고 강렬해지는 것 같다. 떠나기 전에 누가 카톡에 “아! 너무나 가고시파 가고시마 여행.”이라고 한 멘트가 생각난다. 2021.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