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혼인 전후사(前後史) 1

청솔고개 2022. 2. 16. 23:02

 

                                                                    청솔고개

   앞에서 우리는 단지 세 번 만나보고 혼인을 결행했다는 말을 했다.  아내는 당시 은행에 근무했었다. 만나 볼수록 직장여성으로서의 세련됨과 친절, 배려가 매력으로 비치었다. 41년 전 2월 말에 우리는 혼례식을 올렸다.

   바로 시댁, 즉 큰집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원래 상가로 꾸며진 집이었는데 홀에 피아노를 비롯한 주요한 살림을 두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층층시하 시집살이였다. 위로는 시조부모, 시부모, 아래로는 시동생 둘, 시누이 둘의 대가족이었다. 군에 가거나 공부하러 외지에 간 동생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시동생 하나는 옆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혼인 후 살림을 내 준다하더라도 가풍과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달은 같이 생활해 보는 것이 관례였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동의한 셈이다.

   아내는 직장 근무하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준비도 하고 퇴근해서는 시간이 있는 대로 저녁 준비도 하고 살림을 도왔다. 아내로 봐서는 새 신부로서 시댁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작동한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해주는 아내가 고맙고 기특했다. 아내는 자신의 월급까지 시어머니께 맡기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공존에는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이 부족해도 주말에 늦잠 한번 푹 자지 못했다. 직장 생활하는 아내가 휴일에 좀 쉬기도 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불가능했다. 저녁 시간에 간단한 외출도 일일이 어른들께 허락 아닌 허락을 맡아야 했다. 늦게 귀가 하는 것도 눈치 보였다.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었다. 우리 내외는 신혼의 단꿈 꾸기보다는 대가족의 분위기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3대의 동거는 서로에게 크고 작은 불편함이 수반되었다.

   6월 말 경 어느 날 아침에 아버지가 우리 보고 너희들이 이제 그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서로의 편의를 위해서 나가서 살아보는 게 어떠하겠느냐고 제언하셨다. 우리는 내심 반색했지만 겉으로는 일단 사양을 해 보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도 신혼인데 오붓하게 살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권고하셨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체 따르겠다고 말씀드렸다.

   살림 날 집은 아버지의 지인 집이었다. 전세금 250만원은 부모님이 마련해 주셨다. 주말에 이삿짐을 다 싸고 출발하면서 어머니께 이별 인사를 드리려는데 나는 왈칵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눈물이 비쳐졌다. 이제  제비 새끼가 커서 비로소 어미 둥지를 떠나는구나. 그동안 부모님의 그늘에서 있으면서 모든 걸 맡기다시피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정말 독립이구나 하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하고  좀 외롭기도 하였다.

   셋방은 아래채 별채로 이전에 빵공장을 하던 건물을 주택으로 개조한 집이었다. 들어갈 때는 잘 몰랐는데 한 여름이 되니 서향집 특유의 내려쬐는 불볕을 방지할 수 없어서 밤새 열기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제 우리만의 독립된 공간 확보로 신혼의 달콤함으로 그 모든 걸 이겨냈던 것 같다.

   그런데 전부터 아내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하나 있었다. 가끔 내게 하는 말이 "우리가 혼인한지 몇 달 됐는데 아직 내가 태기가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그냥 심상하게 임신소식을 기다리는 듯이 말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간절히 원하고 있고 벌써 이에 대한 불안함을 감추고 있음을 그때 나는 알아차렸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몇 대 종손, 시조부모 슬하에서 당연히 후사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게 당시로서는 가장 큰 소임임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아내 보고 아직 소식 없느냐고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난임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명절 때는 종조 할머니 한 분이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지나가는 말로 “종손부 밥값은 언제 하노?” 하긴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괜찮다고 암만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2022.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