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혼인 전후사(前後史) 3

청솔고개 2022. 2. 18. 21:59

 

                                                                                                                           청솔고개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신혼 생활은 초기부터 고난의 점철로 이어졌다. 내 목이 돌아간 그 집에서는 이어서 두 차례의 가벼운 화재, 한 차례의 아내의 유산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모두 자칫하면  큰 화재로 이어질 뻔 하였다. 더욱이 유산은 떠올리기도 싫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특히 아내의 임신 소식은  그간 마음 졸이던 아내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었는데 일순 무너져 버렸으니 그 절망과 상처는 말할 수 없었다. 마침 현충일 공휴일이라서 동료 하나와 낚시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이미 병원에 가서 유산처치를 받고 친정으로 가 있었다. 나를 보더니 대성통곡을 하였다. 흘러내린 아기집을 부여잡고 "아가야, 아가야……." 하고 오열하면서 차마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는 아내의 하소연을 들으니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난임에 대한 아내의 우려를 의식한 나머지 많은 노력을 이어갔던 터라 이 일은 큰 충격이었다. 그 동안 난임에 아주 용하다는 한의원, 한약방을 찾아 대구며 부산을 전전하기도 했었다. 한 번은 부산의 어느 약국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면서 들렀다가 근처의 을숙도, 에덴공원을 찾아보았다. 아내의 답답한 심사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고 싶어서 내가 제안한 것이다. 낙동강 하구에는 메마른 갈대 잎이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자라서 서걱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들어가서 아내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아내의 파리하고 초췌한 표정은 당시 아내의 심경을 그대로였다. 그때 사진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지금도 한 번씩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한번은 어머니가 아내보고 좋은 데 빌러 가야 한다고 해서 죄인 아닌 죄인 신세라 두말없이 무작정 따라간 적이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산 좋고 물 좋은 명산 계곡인데 아기 생기는 영험이 좋기로 소문난 바위 밑이었다. 동행한 보살은 촛불을 켜고 아내한테 준비해온 치마저고리를 입게 했다.  어머니 것이라 아내한테 맞지 않아 반소매 저고리와 몽당 치마 차림이 된 아내는 장시간 보살이 비는 동안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 3월초 새벽 꽃샘추위에 심한 마음 고생, 몸 고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차림을 벗으면 안 된다 해서 그대로 돌아오다 보니 버스간의 다른 사람 보기에 너무 창피했었다고 했다. 

   그나마 아내가 맞 일을 하기 때문에 일에 묻혀 있을 때는 난임의 불안과 강박에서 잠시 벗어 날 수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내는 해마다 닥쳐오는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 제일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아이와 관련된 날이기 때문에 아이 없는 아내로서는 매스컴에서 온통 부산하게 떠들어 대는 그런 기념일이 싫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또한 그 때는 배 불룩해서 나다니는 임산부를 어쩌다 지나쳐 보고나면 그날은 종일 침울해 진다고 했다. 심지어 화마저 나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그런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한번은 5월 가정의 달 즈음해서 난임 주부가 아기 없는 나머지 상심해서 우울증으로 시달리던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는 기사가 지면 귀퉁이에 나 있었는데 혹 아내가 그걸 볼까봐 그 신문을 몰래 내가 치워버렸던 기억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우리는 임신에 관련된 각종 검사 등 가능한 모든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내가 더 협조적이었으며 때로는 눈물겹기도 했었다.

   우리는 주말이 되면 주로 토요일에는 큰집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일요일 되면 자전거에 낚싯대를 싣고 아내는 자전거 뒤 짐실이에 태우고 인근 강이나 못에 가곤 했다. 내가 낚시를 좋아하기도 했었지만 낚시하는 시간은 아내의 공허하고 무료함을 채우는 방법이었다. 처음에 아내는 피라미 한 마리 만지지고 못하였다. 오랜 시간 나와의 낚시동행으로 떡밥 주무르는 건 물론이고 지렁이를 토막 내서 바늘에 끼울 정도로 낚시에 익숙해졌다. 아내는 낚시에 한껏 재미를 붙였다. 낚시에 빠져서 막차를 놓쳐버리고는 지나가던 자가용 승용차를 세워서 타고 온 적도 몇 번 있었다. 우리는 한여름이면 한라산 산행을 비롯해서 철따라 가깝고 먼 데 여행도 원 없이 하곤 했다. 이렇듯 우리는 신혼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연인들이 최상의 연애 기간이었다.그 한순간을 원없이 뜨겁게 살아 냈다. 우리에게 최선의 삶이었다.

   우리는 혼인 셋째 해 여름에 결국 우리의 불행이 이어졌던 그 집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이후 몇날며칠 동안 발품 팔아 셋방을 구해 다녔다. 아내의 근무처와 나의 장거리 통근 등 조건에 맞는 데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터미널 근처 내가 버스로 통근하기 적절한 데 한 곳을 발견했다. 한 여름에 입주한 그 집은 옥탑 방이라 널찍한 옥상 공간이 멋졌다. 여름철에는 그지없이 쾌적하고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겨울에 들어 중앙집중식 연탄보일러 난방은 옥탑 방에는 유명무실하였다. 아주 멋모르고 한 최악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추위에 서로 부둥켜안아가면서 그 겨울을 버텼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토록 세상 물정 모름을 서로 한탄할 뿐이었다. 우리 옥탑 방 올라가는 계단은 주인집 거실을 거쳐 가야만 했다. 외출했다가 좀 늦어지면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대문도, 현관문도 연로한 주인 내외에게 열어달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인 내외가 잠들어버리기라도 하면  깨워야하는 불편함도 컸다. 주인 내외는 저녁 8시만 넘으면 잠들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우리행동도 여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우리는 그 집에서의 기거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다.

   견디다 못해 그 이듬해 봄부터 우리는 또 새로운 거처를 구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인편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복덕방, 담벼락에 게시된 광고물 등을 샅샅이 살피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당면과제는 우리가 영구히 기거할 우리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공통의 큰 목표가 생겼다. 장인어른 편을 통해서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하루는 장인어른으로부터 적당한 집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퇴근 후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공원 북쪽 사과밭 속에  위치한 새로 지은 단층 양옥집이었다. 붉은 벽돌로 외관을 붙여서 아담한 게 꼭 우리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보면 붉은 성채 같이 멋있었다. 붉은 벽돌로 멋지게 짜 올린 대문 위로는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붉은 줄 장미 넝쿨을 올리면 딱 좋을 것만 같았다. 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일차적으로 집값이 문제였다. 우리는 집값 절반을 은행 대출로 감당하기로 했다. 드디어 집 주인이 이미 진 빚을 먼저 갚아 주는 조건으로 구입했다. 집문서가 우리한테 넘어온 그날이 생애 최고의 날인 것만 같았다.

   세든 집 주인의 인심 너무 고약하면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일찍 집 사고 시어머니 구박 너무 심하면 며느리들이 뜻 맞아 똘똘 뭉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그해 4월 말,  드디어 우리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는 친인척, 직장 동료, 친구들을 불러다 집들이 행사도 제대로 했다. 모두들 혼인 3년 만에, 그것도 그림같이 참한 집을 장만했다고 칭송하고 치사하기 바빴다. 우리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고대하던 회임의 숙제도 그 동안의 집 구입과 이사에 대한 흥분과 감격에 다 묻혀 버렸다. 대지 60평에 건평 25평의 우리 집은 양편으로 사과밭 속에 게 들어앉은 형국이었다. 이는 나의 전원취향마저 적이 충족시켜 주었다. 우리는 세상 다  가진 것 마냥 한없이 행복해 했다. 수도관을 끌어 상수도를 쓸 수도 있었지만 우물의 수질이 최고 청정해서 굳이 상수도를 쓸 필요가 없다고 이미 세 들어 사는 새댁의 설명이 이 집의 매력을 한층 더하고 있었다. 과연 과수원 한 가운데 사질토를 파서 만든 우물의 수질은 단연 최고였다.

   우리는 그래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장모님도 장인어른도 앞서서 백방으로 더 신경 써 주셨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운에 자식이 보이면 언젠가는 우리 품에 올 것이라고 믿었다. 자식은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 그대로 하늘이 점지하면 자식이 있을 터이고 없으면 팔자소관이라 여길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우리 내외의 삶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체득하였다. '기다림의 미학', 이는 4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 우리 내외의 공통 신념임을 굳건히 확인하곤 한다.    2022.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