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2022. 2. 25. 12:49
청솔고개
나는 이제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낙엽송, 낙우송, 상수리 등이 층층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은 아득히 위로 뻗치고 있다. 바닥은 특이하게도 습지다. 층마다 물기가 질벅하다. 그래서 두터운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있다. 키 큰 나무 꼭대기로는 쏴아 하는 하늘 바람이 불고 있다. 너무 빽빽해서 해살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나는 오늘 밤 여기서 묵기로 작정한다. 지형과 지세를 관찰해 본다. 왼쪽 계곡 너머 거무스름한 물체가 보인다. 멀리서 보니 괴물 같다. 가까이 가 본다. 쩍 벌어진 바위가 시옷자로 겹쳐 있다. 밑은 넓적한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서 이슬이나 비를 피하기 아주 좋은 형국이다. 바위 위에는 크고 작은 떨기나무 몇 그루가 그림자처럼 서 있다. 나는 그 밑으로 들어간다. 위로 벌어진 틈으로 저녁 하늘이 빠끔히 보이지만 찬바람과 밤이슬을 피하기는 이만하면 족할 것 같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면서 낙엽무더기를 찾아서 바싹 마른 윗부분을 날라서 바위 밑에 펼친다. 푹신한 침대 쿠션 같다. 그 위에 비닐포대기를 깐다. 마른 먼지 같은 낙엽 냄새가 코에 확 들어 친다.
바위 사이로 저녁별 몇 개가 쏟아질 듯 떠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별 몇 개를 쳐다보니 왈칵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나의 청춘시절이 서럽게 확 다가온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西山)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오늘따라 가람님의 별이 읊조려진다. 오늘이 음력으로 초사흘인지는 모르지만 이 산 속에서 쳐다보니 하늘은 금방 세수라도 한 듯 말간 얼굴을 하고 있고 별 몇 개가 마치 소녀의 눈망울처럼 반짝이고 있다.
나는 촛불을 켠다. 바위 밑에 촛불을 켜니 내가 무슨 원이 있어서 이 영험한 바위에게 빌러온 신세 같다. 시방 나의 원은 무엇일까? 숲이 쉬는 숨결에 촛불이 일렁일렁한다. 촛농이 원의 눈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하루하루를 나는 그렇게 빌면서 살고 싶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으로 요기를 할까? 배낭을 열어보니 아직도 제법 많이 남아 있는 건빵이 있다. 길 가 트럭에서 큰 포대로 파는 걸 사서 가져오길 잘 했다 싶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마른 잔가지를 주섬주섬 주어다 놓는다. 넓적한 청석을 있는 대로 모아서 부엌을 만든다. 그 사이에 잔가지를 넣고 불을 지핀다. 냄비에 식용유를 넣고 냄비를 그 위에 얹는다. 금방 달궈진다.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난다. 건빵을 넣어서 잘 배도록 섞어준다. 소금을 약간 친다. 5분도 안 돼서 멋진 저녁 식사가 마련된다. 튀긴 건빵 맛이 환상적이다. 군 시절에 튀긴 건빵 맛에 혹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산속의 밤이 깊어가니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두꺼운 파카를 꺼내서 걸친다. 금방 온기가 찬다. 이런 기분이 참 좋다. 풀잎에는 이슬이 촉촉하다. 일렁이던 촛불에 초가 반 밖에 남아있지 않다. 스스로 태워서 어둠을 밝히는데 무슨 원이 있어서 눈물까지 흘러내리나? 남은 촛불 아래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일렁이는 촛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촛불너머 나의 한 생애가 실루엣으로 어른거린다. 여치인지 매미인지 밤벌레 소리가 더욱 요란하다. 아직 귀뚜라미 소리가 들릴 계절은 멀다.
끝없는 상념에 잠기다가 잠을 설친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이 깼다. 멀리서 부엉이소리가 메아리친다. 새벽녘이다. 뽀얀 구름 위로 반달이 떠가고 있다. 나무인지 바위인지 위에서 이슬이 빗물처럼 축축하다.
내 청춘 시절의 어느 여름 날 저녁, 네 동무와의 여행길에서였다. 절 뒤 숲속 천막 안에서 잠을 청하는데 초사흘 초승달이 이슬 젖은 풀잎 새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경내 풍경소리는 밤새 계곡물 소리와 어우러져 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는 초승달 서러운 얼굴과 밤새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로 그 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었다. 오늘밤은 숲속의 바람소리가 나를 재워준다. 초저녁 잠 한숨 잘 수 있어서 좋다. 2022.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