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통증과 슬픔/이 새벽에 나는 아버지의 ‘고통 극복을 위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생존(生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청솔고개
2020. 5. 9. 05:54
통증과 슬픔
청솔고개
(전략)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生産)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략)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영혼을 정화(淨化)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信念)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神)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한 동안 교과서에 실려서 많은 아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유달영님의 ‘’슬픔에 관하여‘란 제목의 수필 끝부분이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얼마 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도 그 아이는 알지 못한 채, 마냥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겪는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슬픔과 이를 극복하려는 과정을 표출한 것이다.
마음의 고통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대체로 슬픔은 마음에서, 고통은 몸에서 나온다.
나도 새벽까지 고통 속에서 잠 못 들고 전전반측하시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상념에 젖어본다. 오늘은 새벽 4시까지 안절부절 못하신다. 침상 머리 부분을 올려 달라, 내려달라, 다리와 오금 부분을 봉긋 솟아나게 해 달라, 등을 반대로 돌려 달라, 끝없이 주문을 하신다. 또 침상에서 막무가내로 내려오시려 한다. 이를 내가 급히 말린다. 한밤을 오롯이 아버지와 같이 한다.
나는 이러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배고픔과 더불어 참을 수 없는 통증은 사람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인격과 품위 유지를 포기하게 하고 거의 동물 수준으로 가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로서, 중립적 의미의 별세(別世), 작고(作故)와 같은 말도 있지만 ‘안식(安息)’이니, ‘영면(永眠)’이란 말이 따로 사용되는 배경을 짐작 할 수 있겠다. 고통 없이 그냥 잠결에 가는 사람도 있다. 흔히 죽음의 복을 타고 났다고도 한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노년에는 병상의 고통이라는 과정을 거치다가 기력이 다하면 ‘편안함과 휴식’[安息], ‘영원한 잠’[永眠]의 단계로 접어든다. 생명 유지에서 종식으로 가는 과정은 그렇게도 지난(至難)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을 육신의 통증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고 쉽게 말하지만 순간순간 조이어 오는 오감(五感)의 단말마(斷末魔)적 육체적 고통은 더 실감나고 진저리쳐지는 직접적, 절대적인 고통이 아닐까 여겨진다.
새벽 4시 지나 잠시 졸음에 겨워 눈을 붙이고 있는데 간호사가 살짝 흔들어 깨운다. 그새 깜빡 잠이 들었다. 밖은 제법 훤히 밝아오고 있다. 네블라이저[Nebulizer] 치료약을 주면서 좀 이따 6시에 흡입해 드리도록 부탁한다.
문득 아내와 가끔 갔던 새벽시장 풍경이 떠오른다. 병동의 새벽이 시장의 새벽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시끌벅적하다. 병동은 환자들의 신음소리로, 시장은 시장꾼들의 호객소리, 흥정소리로 활기를 띤다. 병동은 소독약 냄새로, 시장은 여려 식자재와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병동은 궁극적으로 생존, 시장은 생활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차이가 있다. 삶이 따분하고 지겨우면 새벽시장을 가보라는 말도 있지만 새벽 병동은 생존의 치열함이 더 넘치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생존과 생활에 익숙한 존재인지도 알 수 있다.
유달영님의 말대로 인간은 슬픔을 통하여 그 영혼을 정화(淨化), 승화(昇化)시킬지는 모르지만 고통은 인간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도록 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예수나 석가 같은 분 외, 적어도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말이다.
이 새벽에 나는 아버지의 ‘고통 극복을 위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생존(生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2020.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