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행로(行路)

소년의 방황 1

청솔고개 2022. 3. 2. 23:11

                                                                                                         청솔고개

   앞으로 여기서 수 차례 나누어서 내가 아는 한 소년의 마음이 방황하는 행로를 연재할까 합니다. 

 

   한 소년이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소년은 면부(面部)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소도시 시내(市內)[성내(城內]로 이사했다. 환경이 확 바뀌었다. 소년은 어린 마음에 여기서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예 무시할 수 없도록 먼저 방어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였다. 무시당하는 건 죽어도 싫었던 것이다. 못난 게 오히려 자존심은 더 세다나!

   소년은 작년 1학년 기간 동안 시골 출신 학생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정말 죽어라고 공부했다. 공부만이 그의 자존심을 유지해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성적이 급상승하였다. 1학년 말 1학년 전체 성적은 학년 전체 6위를 기록했다. 이 성적으로 2학년에 진급했다. 이제부터는 2학년에서는 이 기록을 지켜나가야 할 처지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항상 어렵다고 그랬다. 그 과정에서 늘 극도로 긴장하고 불안한 심적 상태에서 벗어나자 못했다. 2학년 말 성적 통계를 보면 2학년에서는 여덟 번 월말고사와 네 번의 중간, 기말 고사에서 반에서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한번은 평균 99점으로 전체 420명 중 수위를 차지해서 대표로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성내 토박이 학생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마음이 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럴수록 반의 실장으로서 1위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성적(成績) 강박(强拍)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이러한 강박․불안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런 심적 상황이 자신의 원초적으로 평화로운 심성을 망가뜨릴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소년의 심적 상태는 마치 요즘 유명 연예인들이 자기 인기의 정상을 유지하려고 갖은 수단과 심적 압박을 감수하는 것과 같은 상황과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일순간 비끗하면 한없는 나락(奈落)으로 곤두박질한다. 그러면 모든 게 거품이 된다. 화려한 조명도, 천문학적인 출연 및 공연료도 한낱 일장춘몽(一場春夢). 소년은 일찍이 그런 불안한 상황을 예견하고 방어하려는 냉혹한 경쟁사회에서의 원초적인 생리를 미리 알아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부벌레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죽어라고 공부하는 만큼, 시나브로 소년의 내면은 피폐해 가고 있었다. 평화와 동심이 가득한 원시 상태의 싱싱한 소년의 마음 밭은 황폐하기 시작했다. 어설픈 지식으로 포위되어 너무 예민한 의식이 처음에는 바늘처럼 그를 찌르다가 급기야 굵은 대못이나 송곳이 되어 소년의 마음을 마구 찔러댄다. 소년의 정신과 의식은 마치 탱탱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과도한 긴장의 연속상태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병증과 같은 공부벌레는 마음의 속으로만 자꾸 파고든다. 자꾸 갉아먹는다. 한없이 반복된다. 당연히 걷잡을 수 없는 후유증이 따른다.

   여기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상황이 작용하였다. 전교 6등으로 2학년으로 진급한 소년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2학년 6반 담임교사 직권으로 일방적으로 지명된 학급실장 직이었다. 실장 품위 유지라는 압박감이 하나 더 가중되었다. 숫기 없고 면부 출신 촌놈 소년에게서 실장 노릇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신통찮은 소년은 결코 실장 그릇이 못된다고 자평(自評)했다. 이른바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거다.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긴 사납고 엄하기 짝이 없었던 체육선생님 시간을 감당할 깜냥도 배짱도 없었다. 체육시간마다 그 호랑이의 주문대로 아이들을 통솔하는 건 정말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홈룸(학급자치회의) 시간을 진행하는 일도 서툴렀다. 그냥 정신없이 허둥댈 뿐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 자기의 이런 모습을 반 아이들한테 그대로 노출되는 게 참 싫었다. 자기의 부끄러운 속살과 밑천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이니까.          2022.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