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얼마간은 그냥 버텨보았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몇몇 친한 친구들과 같이 자기의 문제를 의논하였다. 주로 등하굣길에서였다. 어떤 방법으로 담임교사께 실장을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표할까. 그러나 이렇게 고민만하다가 일 년 내내 결국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그만둔다는 건, 담임의 지시를 거부하는 거로 비칠 것 같아서였다. 참 용기도 없었다. 이렇게 소년의 심성은 여렸다. 늘 한숨만 내쉬곤 했었다. 그렇게 2학년 1년을 그냥 보내 버렸다. 한마디로 소년은 제 주장 한 마디 못하는 암사내였다. 극단적으로 내향적 성격이었다.
그 해 겨울에 접어들자 갑자기 알 수 없이 무단히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의 단초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에야 대략 알 수 있었다. 요즘 인기인들이 많이 겪고 있다고 하는 공황장애 같은 거라고도 여겨진다. 자신의 마음의 행로는 헝클어지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끝없는 미로였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실체도 없는 막연한 질병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로 출발하였다. 그 공포와 불안감의 씨앗은 어디서 날아왔는가. 필경 지난 2년간 공부 경쟁과 실장직 수행으로 극도로 힘들어 부대꼈던 학교생활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소년의 연약하고 불안한 마음 밭은 그 씨앗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소년의 마음은 마냥 막연한 질병에 공포로 멍들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한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소년은 이십 리 쯤 떨어진 시골 할아버지 댁에 있는 생활백과사전을 즐겨 읽곤 했다. 거기서 매독(梅毒)이라는 항목이 발견한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풀이된 충격적인 병증세가 심한 공포감으로 작용하여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혹은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매독이라는 성병에 대한 불안공포증이 엄습한다. 불안과 공포, 불쾌한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밤에는 잠도 거의 자지 못한다. 새벽 4시, 땀에 흥건히 젖은 베개 부여안고 한두 시간 겨우 눈 붙인다. 잠 대신 그 병에 걸려 미치기까지 하는 끔직한 망상(妄想)이 자꾸 떠오른다. 어머니와 할머니나 어른들께 소년의 힘든 상황을 말해도 별무 반응이다. 관심이 아예 없다. “니가 방학이라서 너무 편해서 그런가 보다.” 정도이다. 어른들은 그냥 심드렁하다. 그럴수록 매독 병증에 대한 섬뜩하고 지독한 두려움이 그의 뇌리에 파편처럼 점점 깊이 각인되어 간다. 정말 치명적인 침범이었다. 그냥 꽂혀들었다. 늘 반복하여 떠오르는 떠올리기도 싫은 생각,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불쾌하고 불안한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 생각이란 대략 이런 거다. ‘이건 정말 무서운 병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공포의 병이다. 히틀러도 이 병에 걸려서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결국 폭군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히틀러가 자살했다고 전해지지 않았던가. 더러는 측근에 의해서 사살 당했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다. 이 병에 걸리면 멀쩡한 사람도 뇌에 이 병증이 침범하여 자기도 모르게 미치광이가 된다. 이런 정신착란(精神錯亂) 증세가 돌발하여 아무런 원한도 없는 주변 사람을 돌발적으로 죽인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고. 소년은 자기의 성격의 약한 부분을 스스로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공포와 불안에 잘 감염되는 치명적(致命的)인 내향 성격이라는 것을. 밥맛도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 동안 학교생활에서 팽팽하게 긴장하던 마음의 활시위가 버티다가 결국 터져버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점점 극심한 공포, 불안감으로 되어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밥을 먹어도,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여도, 책을 읽어도 한 순간이라도 그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밤에 잠도 잘 들지 못했다. 그 불쾌하고 불안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머리가 멍하고 어지럽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집중도, 몰입도 되지 않았다. 다른 아무런 것에도 흥미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한마디로 살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무단한 불안감의 악화는 쉽게 진행되었다. 2022.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