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강렬한 부추김 그리고 유익한 땀방울을 통해 나는 하늘을 날아오르고, 어린 시절과 두려움과 고정관념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나는 사회가 얽어맨 줄을 끊고, 안락의자와 편한 침대를 외면하다. 행동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걸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몽상하기란 쉽지만, 걸으면서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날아오르는 독수리, 흘러가는 구름, 도망치는 산토끼, 엉뚱하게 마주치게 되는 교차로, 이름 모를 꽃의 진한 향기, 목동의 외침 혹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의 흰 물결, 이렇듯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 걷는 이는 수많은 사소한 사건들에 이끌려 명상에 벗어나 자신의 길로 되돌아오게 된다.~”
위의 인용은 앞서 올린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1, 아나톨리아 횡단’에서 142쪽 중의 일부이다.
나는 옛사람들이 현대인 못지않게 왜 그렇게 지혜로왔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지혜로움은 동서의 고금 현인들이 남긴 많은 저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단 한 가지, 옛사람들이 자연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옛사람들이 왜 그토록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자연에서 출발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당시 인간은 살아가는 모든 지혜를 생활과 밀착된 자연에서 구했으며 또한 끊임없이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이동수단은 두 발로 걷는 것이다. 이 또한 자연과 밀접하게 된 이유이다. 걸으면서 천천히 자연을 관찰하게 된다. 당시 신분이나 여유가 있는 층은 말, 마차, 가마, 교자 등의 이동 수단을 이용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걸어서 이동했다. 두어 시간 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그 때는 거의 보름에서 한 달 동안 걸어서 이동했다. 한양에 과거보러 갔던 선비들이나 보부상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심지어 다른 나라로 외교 사절로 가는 경우에도 크고 작은 사절단을 꾸려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걸어가면서 숙식도 노상에서 해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옛사람들의 눈에는 무엇이 비치었을까? 철따라 혹은 하루에도 아침, 저녁, 밤의 시간마다 바뀌는 자연의 운행이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 구름, 바람, 먼 산의 변화, 강물의 흐름, 날씨의 변덕 등을 맞닥뜨리면서 끊임없이 자연과 소통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명상하고 사유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존도 자연에 더욱 의존했었다.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 농사가 잘 되면 그 결과로 요순(堯舜)시대가 따로 없다면서 함포고복(含哺鼓腹)하곤 했었다. 세상 모든 운행은 조물주의 섭리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울 때 자연의 도움이 도래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잘못으로 자연의 노여움을 사면 그것이 바로 재앙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자연을 경외(敬畏)하였으나 자연과의 공존만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는 일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옛사람들의 지혜의 실마리가 찾아지는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자연관과도 아주 잘 통한다.
최근 들어 지구촌 파워의 중심이 아시아, 그것도 극동으로 옮겨진다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이 지역 옛사람들의 자연관 때문이다. 자연을 도전, 경쟁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포용, 조화, 상생의 대상으로 보았던 세계관에서 연원이 된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문명사학자나 인류학자, 미래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지난 날 차량 5부제 운행제 실시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자전거로 출근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이는 물론 에너지 난 완화와 탄소 저감 정책 강화와 관련된 국가적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늘 차량으로 출퇴근하다가 주 1일은 자전거로 이동하였는데 그날은 불편하다는 생각에 앞서서 출근 기분이 묘하게 달라짐을 느낀다. 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가면 길가의 풀들이 하나하나 다 눈에 들어온다. 멀리 강에는 어떤 새들이 놀고 있는지 다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심한 우울감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는 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가면서 내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게 된다. 온갖 들풀들을 보게 된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들풀들의 얼굴을 하나씩 분간할 수 있다. 이건 질경이, 민들레, 저건, 개망초, 들국화, 저 둔덕 위에는 창포, 더 멀리 물가에 보이는 건 부레 옥잠 등등……. 그 풀과 꽃잎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들, 여기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메뚜기나 여치, 개미나 거미 등도 보인다.
어떤 여행가의 말이 생각난다. 이동 수단으로만 볼 때, 가장 멋진 여행, 여행다운 여행은 걸어서 하는 여행이고 그 다음으로 자전거, 자동차, 기차, 비행기 여행 순이라는 거다. 여행의 성취는 그 이동 속도에 반비례한다. 상지상(上之上) 여행책(旅行策)이 도보여행(徒步旅行)이다.
내가 얼마 전 치과 진료 갔다가 6킬로미터를 걸어서 집에 오는 용기를 냈다. 물론 허리 보조기 신세라 수차례 쉬면서 천천히 걸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내 눈과 마음에 들어왔다. 마을과 도로, 새로난 숲길도 보인다. 청춘시절 내가 열정을 바쳐 일했던 삶의 그 현장을 지나면서는 내 30대의 추억까지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두에 따온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진술은 천 일 넘게 끝없이 걷기만 했던 전문도보 여행꾼으로서 여행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202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