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2022. 3. 6. 20:01
청솔고개
어쩌다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그들의 주택 배치에 관심이 많이 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미 동부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달리는 길에서 보았던 풍광이다. 종일 달리는데 숲 속엔 길만 있고 길옆에 주택이 띄엄띄엄 보인다. 그것도 다 10여 미터 넘는 나무로 된 숲 속에 숨어 있고 일부만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의 집집마다 예외 없이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더러는 집 주인이 잔디 깎는다고 설치는 게 보였다. 이 나라의 조상들이 정말 멋진 데를 제대로 탈취(奪取)했구나하는 생각에 부러움과 질시로 10시간 넘게 운행하는 버스 간에서 잠 한숨 이루 수 없었다. 이 땅의 원주인 인디언 것이었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무단으로 점령해서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살면서 이렇듯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불공정한 처사라는 생각이 문득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미 동부 해안 길을 달리는데 바닷가 부두에는 하얀 색깔의 요트들이 수없이 정박해 있는데 주택은 잘 안 보여서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대부분의 주택은 해안 숲 속에 들어있어서 눈에 잘 뜨인다고 했다. 미 동부 여행에서 가장 충격 받은 게 바로 이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해안 가 숲속에서 가려진 채로 있는 주택에 살고 있는가 싶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아파트 숲을 떠올려 보았다. 평지가 부족한 우리나라는 점점 집들이 산골짜기로, 산 능선으로 올라간다. 산들은 흉물스럽게 절개된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다. 더러는 그 상처가 성이 나서 축대 붕괴니 산사태를 불러 일으켜 도심에서도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는다.
그로부터 15년 지난 뒤 우리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내는 이사 조건을 일단 남향집일 것, 은행, 시장, 병원 등의 볼일을 편리하게 볼 수 있는 도심에 가까운 곳 혹은 대로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시내버스 정류장만 있으면 된다면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했다. 나도 아내의 그런 서두름에 그냥 휩쓸려 더 이상 집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사를 단행했다. 그간 7년 넘도록 이 집에서 살아보니 이제부터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불만은 우리 아파트 동이 뒷동이라는 것이다. 확 뚫린 앞의 풍광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에 내가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을 체크해 보니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대략 5시간 정도였다. 햇빛은 여름철이면 가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고 겨울철이면 종일 비춰주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 내다 볼 수 있는 앞 베란다에서의 전망도 니은자로 지어진 우리 동과 앞 동 사이를 통해 멀리 남산 봉우리와 그 앞의 산자락, 동네를 볼 수 있다. 그나마 9층이라 전망이 좀 생기는 편이며 1,2층이라면 앞을 막고 있는 주택가의 낮은 지붕과 막아진 벽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문득 전망만 살리기 위해 강변에 한 동씩만 지어진 아파트 생각이 났다. 종일 햇빛이 비치고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과 주택가, 그 너머 남산 자락과 남산 연봉……. 생각만 해도 부럽다. 물론 이런 아파트는 너무나 소규모여서 관리가 부실할 것이며 대로변이라서 마구 달리는 차량의 소음도 만만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아파트도 역시 1,2층은 차량 소음과 이에 따르는 먼지 세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고 보니 이런 옛말이 생각난다. “자고로 물 좋고 정자 좋은 데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제법 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사 후 처음 몇 달 간은 이왕 이사를 하는데 전망 좋은 곳을 선택했어야 한다는 아쉬움과 후회에만 꽂혀 있어서 주변의 풍광이 아예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차츰 살다 보니 남동쪽으로는 남산과 그 앞의 전경이, 앞 동과 옆 동 사이의 틈인 남서쪽으로는 옥녀봉과 송화 산이, 뒤 베란다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도심 공원이, 뒤 베란다 북동쪽으로는 소금강산을 다 조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즘 도심에 갈수록 주택의 조망권과 일조권이 더 부각되는 추세라고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탐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많은 곳을 다니면서 그곳의 풍광에 대한 탐심이 얼마나 심했던가. 눈과 마음으로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 얼마나 아까워하고 애석해했던가. 불가에서는 그 욕심을 버렸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해서 나는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말하지 말라. 만족함을 알았다고 해서 나는 만족할 줄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해서 나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말라.”
등대 너머에 파도가 치고 갈매기가 노니는 해안의 절경,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의 풍광, 낙화유수(落花流水)하는 산중 계곡의 풍류마저 극복해야 나는 비로소 마음의 평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요즘은 큰방 침대에서 머리를 서쪽으로 하고 있으면 남산 전경이 바라다 보인다. 이렇게 침대 머리만 바꿔도 숨은 보석 같은 풍광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른 새벽 미명 아침 햇살이 산마루와 들녘, 마을의 주택 지붕에 천천히 금색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느긋이 바라보는 즐거움, 이 색다른 발견은 양보할 수 없다. 햇살이 가장 깊이 들어오는 오후 3시에 베란다에 앉아서 혼자 남산자락과 들녘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커피의 깊은 맛을 외면할 수는 없다. 2022.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