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행로(行路)

소년의 방황 4

청솔고개 2022. 3. 7. 22:32

                                                                                                          청솔고개

   소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까지 겨울 산엔 거의 가 보지 않았었는데 소나무 숲 사이로 유난히 맑고 파랗게 보이는 겨울 하늘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밋땅 같은 양지바른 곳 떼딴지 위에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치고 누워서 바라보는 겨울하늘은 청청하고 고요했다. 열다섯 먹은 소년이 꿈꿀 수 있고 누릴 수 있었던 최소한의 행복이고 마음의 평온이었다. 소년은 여기서 이대로 그냥 누워 잠들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은 채 그냥 이대로. 그래도 소년은 기우뚱하는 지개를 어설프게 지탱하면서 몇 번이나 쉬어가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능갓의 겨울소나무가 오늘따라 더욱 무심해 보였다. 소년은 집으로 가기가 싫었다. 현실로 되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집으로 가면서 소년의 마음은 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또 밤이다. 다시 엄습하는 불면 현상에 대한 불안과 공포증, 가슴 두근거림, 얼굴 화끈거림, 진땀에 베개 흥건히 젖음 등은 마치 천형(天刑)같다. 온갖 망상(妄想)이 소년을 공격해댄다. 병에 대한 공포감이 또 다른 공포감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새 내내 망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이런 식이다. 할아버지 사랑방 머리맡엔 화로가 있고 그 옆엔 못 쓰는 낫날에 나무 손잡이를 끼워서 만든 칼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 칼의 날카로움이 소년의 가슴에, 뇌리에 비수로 한번 꽂히기 시작하자, 다시금 병의 공포감 대신 칼날의 공포감이 소년의 가슴을 내리누른다. 이른바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지극히 예민해져서 전이(轉移)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변종 불안 바이러스에 다시 감염된 셈이다.

   그 불안함은 순간순간 떠오르고 내리누른다. 만약에 내가 그 병증이 발작해서 갑자기 정신을 놓는다면, 더군다나 매독은 그러한 증세를 유발한다던데, 저 칼로 남을 해할 수도 있지 않는가. 소년 나름대로 이름붙이면 이른바 ‘가해공포망상, 편집증, 강박증’ 같은 것. 이제는 병증보다 그 칼날에 대한 공포감이 소년을 전적으로 엄습해댄다. 그래서 또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하다. 내가 이 순간 저 낫날로 남을 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전전긍긍 불안해한다. 아, 사는 순간순간이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이러한 예리함에 대한 예순이 다된 지금까지도 살아가는 구비 구비마다 소년의 의식을 지배하여왔던 것이다. 그렇게 중2년 겨울 방학은 끝이 나 가고 있었다. 가끔 깔비하러 갔다가 땀을 식히려고 가랑잎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 솔잎 사이 바라보이는 파란 하늘의 서늘한 느낌만이 오직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 비친다. 이 모든 걸 혼자서 끙끙대고 삭여나갔으니 그 해결 방법의 무리함과 무지함이란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소년이 지금은 어른이 되어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에 관심을 가지면서 단편지식만 가지고도 가만히 생각하니 그게 바로 강박증과 불안증의 시작인 셈이다. 그 후 20년 동안, 즉 중학교 3학년에서 고교 졸업 시까지 청소년시절, 대학 시절, 군복무 시절, 신혼 시절 포함해서 소년에게는 1차적으로 이러한 증세는 강약과 주기에 따라 반복 변형되면서 지속되었다. 다만 상황과 환경, 심리적 불안정성의 정도와 기분, 성취와 좌절 등에 따라 부침되거나 심도를 달리해서 유발되었을 뿐이다.    2022.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