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병상 위에서 지상으로 귀환/오늘은 드디어 열이레 간의 이 병동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버지가 이사하시는 날

청솔고개 2020. 5. 9. 23:10

병상 위에서 지상으로 귀환

                                                                                                  청솔고개

엊그제부터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병상에서 내려와 바깥에 나가보고 싶어 하신다. 하기야 보름 동안이나 병상 아래 내려와 본 적이 없었으니 오죽하시겠나. 창밖을 통해서 멀리 보이는 신록의 그늘 밑에 한 번만이라도 가서 맑은 공기와 풀 내음, 꽃향기로 병든 육신을 씻어내고 싶어 하신다. 한 번 만 갔다 오면 씻은 듯이 다 나을 것 같다고 반복해 노래로 삼으신다. 하는 수 없이 엉겁결에 약속을 해 버렸다. 그런데 어제는 휠체어로 바람 쐬기로 한 아버지와의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아내가 대신 보살펴 드리는데, 내가 약속 지키지 않고 피해버렸다고 종일 서운해 하셨다고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버지는 단단히 별른 듯, 휠체어로 바람 쐬러 가자고 다그친다. 회진 온 주치의에게 말해서 허락을 맡고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남녀 간호사가 와서 도와준다. 휠체어에 산소통을 설치하여 호흡기 치료하는 관을 연결하고 오줌 줄과 팩도 옮겨 달았다. 이 과정이 뭔가 잘못될까봐 무척 신경이 쓰인다. 드디어 출발. 빨리 나가고 싶으신 듯, 아버지가 손수 휠체어 바퀴를 막 굴려본다. 움직인다. 다리 힘이 다한 것에 비해 아버지는 팔 힘은 아직 건재하시다.

먼저 6층 복도 동쪽 끝에 가서 멀리 보이는 공원과 그 앞을 가로지르는 강을 보았다. 거의 20일 가까이 못 본 바깥 풍광이다. 아버지는 정성을 다해 깊은 호흡을 뱉으신다. 무슨 종교 의식이나 명상에 몰입하는 것 같다. 맑은 공기를 맘껏 최대한 들이마시고 싶으신 거다. 윗몸을 늘여서 기지개도 펴본다. 5월의 신록과 따사로운 햇살, 상큼한 바람이 사방 널려 있다. 1시간 가까이 집중해서 병원 주변의 산과 숲, 공원과 강, 시가의 모습을 눈에 담으셨다. 마치 이 순간이, 이것이 가능한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노쇠해서 기력이 다하면 일거수일투족도 남의 힘을 빌어야 한다.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절감하게 된다.

멀리 산자락에 연초록, 순백이 어우러진 아카시아 꽃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산 꿩과 산비둘기의 울음도 강안을 메아리친다.

내일은 드디어 열이레 동안의 6313병실 생활을 마감하고 이사하는 날. 오늘밤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병상 동행 여행의 마지막 그 16박. 아버지도 이사에 대한 기대로 약간 설레시는 것 같다. 오늘 저녁에라도 서둘러 가면 안 되냐고 자꾸 재촉 하신다.

난 무엇보다도 제발 오늘 하루 저녁만이라도 편안히 주무셨으면 소원이 없겠다.

                                                                                  2020. 5. 7.

 

 

아버지가 이사하시는 날

                                                                                         청솔고개

오늘은 드디어 열이레 간의 이 병동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버지가 이사하시는 날.

어제 저녁에 우리 형제가 아버지의 면도, 머리감기기 해 드리려고 협동작전으로 한 발자국도 잘 옮기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가까스로 휠체어로 이동해서 바로 옆 샤워 실까지 모셨다. 엄두가 안 나서 처음에는 머리감기기만 해 드리려 했는데, 용기 내어서 몸까지 씻겨 드렸다.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내일 어버이 날 앞두고 드리는 선물로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 씻겨드린 적이 몇 번 안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우리 형제가 함께 힘을 합쳐서 씻겨드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오늘은 아버지의 신수가 훤해지셨다. 적당히 길고 짙은 머리숱에 반백의 은발이 잘 어울리셨다. 도저히 구순이 넘은 상노인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으실 것 같았다. 어제 저녁은 개운해서 그런지 평소보다는 덜 힘들게 잠 드시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 퇴원한다고 말씀 드리니, “퇴원은 무슨 퇴원, 이사 가는 거지……새 집이 이 집보다 좋아야 할 텐데……그래, 여기보다 더 좋을 턱이 있을까?”하신다. 그렇게 자유를 갈구하고 정신의 몰입을 희구하시던 아버지도 기력이 쇠하여 더 이상 당신의 힘으로 일상을 꾸려나갈 수 없음을 인식하시고는 자식들과 가족을 위해서 스스로 고독과 고행의 길을 선택해 주신 것이다. 정말 고맙다.

옆과 맞은편 병상에는 일흔 후반 줄에 들어 보이는 늙수그레한 환자 둘이 통성명을 하고 뭔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둘이 모두 월남전 참전 용사다. 50년 전 청룡부대 출신 두 왕년의 역전의 용사들은 무용담으로 금방 의기투합한다.

한국전 참여, 1950년 가을 북진, 1.4후퇴로 황해도 금천에서 퇴각, 후퇴 하던 중,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부상, 원주 야전병원에서 부상 치료 중 부산으로 후송, 명예 제대하신 아버지와 세대를 아우르는 참전 용사이시다. 살짝 아버지께 저 두 환자는 월남전 참가했다고 말씀 드렸더니 또 아버지 당신의 6.25참전기를 회고하신다.

보조침대 옆 구석에는 지난 17일 간 병동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집에서 가져온 얇은 담요베개 대용으로 한 기저귀박스, 폰 충전기 등을 담은 천으로 된 쇼핑백이 놓여져 있다오늘 아침이 이 동행 여행에서의 마지막 식사다. 오늘 아침 식사도 그 동안 늘 하던 대로 기본 메뉴. 집에서 에어플라이로 구운 고구마 두어 개토마토 한 개삶은 계란 한 개가 다. 거기에다 그라인드 커피 한 잔 더하기. 

1130분에 이송을 담당할 팀들이 다 도착했다. 아버지는 들것에 올려 져서 먼저 출발하고 우리 내외는 나머지 짐을 챙겨서 뒤따라갔다. 이번이 아버지의 마지막 이사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소원해 본다. 아마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이레 째 나의 아버지와의 특별한 병상 동행 여행은 오늘로서 일단 종결되는 것이다좀 쓸쓸하고 조용했다.

                                                                                            2020.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