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그해의 농막일기 25(고춧대 뽑아서 옮기기, 단호박 찾아내기, 농막의 메뚜기, 깊어가는 농막의 가을, 2012. 11. 1.~2012. 11. 6.)
청솔고개
2022. 4. 9. 17:14
청솔고개
2012. 11. 1. 목. 맑음
벌써 11월에 접어들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 날씨도 많이 쌀쌀해졌다. 비가 와서 더한 것 같다. 바람도 많이 분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이란 말이 실감된다.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고춧대를 뽑아도 되는지 물었다. 수고한다며 뽑으라고 했다.
2012. 11. 4. 일. 흐린 후 비.
아내가 준비해 준 호박죽과 고동시 감 상자를 들고 큰집에 들러서 동생 이야기를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다. 암만 이야기해 봐도 별다른 수는 없지 않는가. 그냥 동생더러 자유롭게 하라고 할 밖에. 아주 추우면 들어오고, 컨테이너 집 설치도 아직 유보 상태로 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의 안타까움은 이해되지만 동생생각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나 혼자 가는 길은 어제보다 더 쓸쓸하다. 내 고향 산천, 가을이 짙게 익어가고 있었다. 동산 자락에도 가을 기운이 가득하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호호막막(浩浩寞寞)한 정경이다. 들에는 추수가 다 끝나간다. 먼데 연기가 자욱이 오르고 있다. 들국화도 많이 시들었다. 동생은 농막 거기에 있었다. 늘 혼자인 고단한 인생의 주역(主役). 적막(寂寞)하고 쓸쓸한 그의 모습, 연민(憐憫)과 안쓰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메뚜기가 아직 남아 있다. 고추밭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마지막 생명력을 발한다. 동생 이 고춧대를 다 뽑아 놓았다. 지주(支柱)대도 옆 비닐하우스의 모아져 있었다. 가을의 한 복판에서 이러한 고추밭, 참깨 밭은 더욱 스산한 느낌을 준다.
내가 수고했다고 동생의 등을 살짝 두드려준다. 동생은 어지간해서 좋은 표정으로의 변화는 별로 없다. 고춧대를 좀 옮겨서 밖으로 내 놓았다. ㅈㅂ아재가 와서 그냥 더 말렸다가 나중에 옮겨도 된다고 한다. 저녁답으로 한 번씩 와서 살짝살짝 조금씩 태워버리면 된다고 했다. 비옷을 입고 채전 밭에 갔더니 내 주먹보다 더 작은 애호박이 아직도 남아서 달려 있다. 어쩌다가 다 썩어버린 단호박의 껍질도 이제야 발견된다. 단호박은 참 눈에 안 뜨이더니만, 흙에 묻혀 있다시피 하더니만 벌써 흙이 되어버렸네. 그 동안 단호박 제법 큰 것 두 개를 잘 못 보아서 그냥 썩혀버린 셈이다. 벌써 일찍 자연으로 돌아간 셈이다. 호박넝쿨은 그새 말라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밭에서 가장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인동초(유채꽃) 같기도 하고 쑥부쟁이나 십냉이 같기도 하다. 아직 싱싱하다고 탐스럽다. 비가 온다. 동생은 예의 들락날락하는 그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다. 이제 집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말하니 쌀 다 떨어지면 들어가겠다고 한다. 모두가 동생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이다.
2012. 11. 6. 화. 흐린 후 비.
교정의 입구, 샛노란 은행잎이 반쯤 달려 있고 다 져버렸다. 출입구와 뜰, 잔디밭에 내린 샛노란 가을 꽃송이들이 벌써 반짝거린다.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시구가 생각난다. 벚나무 잎이 그렇다. 진홍색, 뚝뚝 흐르는 선혈 같다. 잔디밭을 걸으면 싸악싸악 하며 밟히는 소리도 서럽다. 언제라도 이렇게 걷고 싶다. 샛노란 은행잎이 일찍이 어린 내게 주었던 처연한 정감은 평생 간다. 초등학교 국어책, 음악책, 자연책에 나오는 은행잎 그림, 무서리 내린 가을 잎들의 명징한 모습들은 평생의 심층 이미지로 내게 선연한 인상을 남긴다. 아! 그 때 한 쪽 한 쪽 넘기면서 달디단 눈길처럼 보았던 교과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안온했던 느낌들. 그건 유년 시절 꿈꾸었던 동화 같은 세상이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고 푸른 잎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요, 남쪽 나라 떠나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손짓하네요.’ 가을 교정과 산하와 뜰과 들에 미만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더 정겹고 서럽고 애틋하고 애잔한 느낌을 주는 것은 예순하나라는 나이 탓인가. 교문 옆 잔디밭에 수북이 쌓인 마른 잎, 우리 집 마당 구석에 뭉쳐져 쌓인 넓은 목련나뭇잎의 버석거림은 또 어떻고. 2022.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