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그날의 산행일기, 삼척 청옥산 2

청솔고개 2022. 4. 12. 03:52

                                                                                              청솔고개                                                                                                          

2012. 5. 20. 일. 맑음.

   지금 무릉도원 청옥산 두타산 입구 엊저녁에 묵은 숙소다.  새벽 3시 좀 지났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 달려왔다. 초저녁에 식사하면서 마신 동동주에 취해 서너 시간 자고 나니 깨니 기분이 찌뿌둥한 게 영 좋지 않다. 화장실에 들어가 신문을 뒤적이기 30분 이상하다가 샤워를 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샤워 후에는 ‘기분 다스리기’ 불안 편을 펼쳐 보았다. 강박 장애인가. 내 마음이 불편한 게,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

   무릉도원에 왔으니 이제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신선놀음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새벽 4시 반으로 알람을 맞추어 놓았지만 아내는 며칠째 잠을 설쳐서 일어나는 게 힘 드는 모양이다. 나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청옥(靑玉), 두타(頭陀)’라는 이 맑고 기품 있는 이름이 주는 매력에 오늘 하루 어쨌든 나를 맡겨봐야 하지 않을까. 가지고간 노트북에 시름을 달랠 겸 몇 자 쳐보았지만 어둠에 익숙지 않아 그냥 덮어버리고 텔레비전 소리를 아주 낮추어서 좀 보다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보았다. 그래도 새벽 5시 30분에는 일어나도록 했다. 오늘 산길이 초행이니 어찌 될 것인지도 모를 터이니까. 새벽 5시 30분 되니 벌써 날은 훤했다. 한 두 사람 부지런한 산꾼들은 벌써 배낭을 메고 출발을 하는 게 창밖으로 보인다. 새우왕사발컵라면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서둘러 출발하니 6시 38분. 나서는 산꾼들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새벽 산길을 걸으니 그늘 속은 마치 초가을 어느 날 오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릉계곡의 무릉반석(武陵盤石)에 발을 디뎌보았다.

   몇 년 전 덥디 더운 여름날 하루 둘째와 같이 와서 셋이서 맛있게 숯불구이도 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날 여기서 오후 보내고 해거름에 42번국도 타고 정선 냇가에 가서 라면으로 저녁 요기하고 강원도 서부 지역 원주까지 일로 달렸던 기억이 새롭다. 원주에서 일박하고 우린 둘째를 용인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죽 태안반도까지 달리다가 폭우를 만나서 고생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삼화사 경내는 고즈넉했다. 이 중생(衆生), 지친 마음을 부처님께 귀의(歸依)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한 간절(懇切)함도 이제는 가뭄에 논 말라버리듯이 말라버린 모양이다. 이 계곡, 박달령이라 했지. 설악산 못지않은 계곡과 암릉(巖陵), 바위, 철철 넘치는 물이 가는 곳마다 탄성(歎聲)을 자아내게 하였다.

   아! 우리는 또다시 이렇게 걷는구나! 이게 도로(徒勞)라도 좋다. 이렇게라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생애 구 할이 바람이고 일할이 햇빛이래도 난 그 바람을 안고 걸어야 하는 존재 아닌가! 걸으면서도 걸으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話頭) 한 자락, 내 평생을 앓아오던 가슴앓이 아닌가. 걷는다고 해서 내 번뇌가 이 바람에 빨래 씻은 듯이 하얘지기를 언제부터 꿈꿔왔던가! 이 녹색 바람에 내 머리가 드러났다고 해서 어떻게 단박에 씻어질 수 있을까? 그립고 눈물겨운 아내가 동행(同行)한다 해서 내 삶의 번뇌(煩惱)가 한꺼번에 씻어질 수 있을까?

   쌍폭, 용추폭포 등 폭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케한다. 온 골짜기를 울리고 뒤집는다. 그래 삶의 9할 9푼이 절망(絶望)이고 번뇌(煩惱)일지라도 1푼의 꿈과 행복과 마음 다스리는 평화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화장기 없는 아내의 말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나 때문에 중간에서 마음 놓일 곳 찾는다고 힘들어 보이지만 내색하지 않고 잘 받쳐준다. 그런 아내가 눈물겹게 고맙다. 눈물 나게 곱다.   2022.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