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그날의 산행일기,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 4
청솔고개
2022. 4. 19. 01:04
청솔고개
2007. 10. 14. 일. 맑음.
새벽 6시 전에 희운각대피소를 가까스로 출발했다. 아직 능선길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우리도 헤드랜턴을 켰다. 좀 있으니 동해 속초 앞 먼 바다 수평선에서 희끄무레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은근히 일출을 기대했었는데 먼 바다의 짙은 구름으로 무산되어버렸다. 아쉽다. 오늘 이 코스는 평균 400~500미터 급 너덧 개 야산의 등산과 하산을 계속하는 것과 같은 난이도다. 숨을 몰아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한다. 대부분 바윗길이어서 쇠말뚝으로 난간을 설치해 놓은 곳이 많다.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너덧 시간 계속하니 비로소 뒤로는 희운각대피소 3.4킬로미터, 앞으로는 마등령 1.7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이정표 너머에는 천하의 울산바위 서쪽 면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렇게 서쪽에서 울산 바위의 측면을 조망하니 특이한 느낌이 든다. 왼편인 서쪽으로 바라다보면 용아장성(龍牙長城)이 그대로 길게 늘어서 있다. 멀리서 봐도 천하의 비경(祕境)이다. 이 곳은 이전부터 그 위험성 때문에 일반 산꾼들의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해 놓아서 더욱 눈길이 자꾸 간다. 오른편인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소공원, 외설악, 뒤편인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남설악 화채봉, 서북능선, 대청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쾌한 조망이다. 일망무제(一望無際),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말은 이럴 때 어울릴 것 같다. 험로이지만 변화무쌍한 코스에다 천하 절경 조망에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어언간에 우리는 1275봉, 큰새봉, 나한봉을 거쳐 마등령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의 보무는 호쾌하기 짝이 없다. 마치 점령군의 위용과 자긍심이 솟구친다. 그 사이 속초 앞바다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때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껏 여행한 곳 중 그 장관에 감동된 곳이 딱 두 군데예요. 첫째가 지금 여기 공룡능선에서 바라다 보이는 설악일대와 속초시와 그 앞바다와 하늘이네요. 광활하고 장쾌한 모습입니다. 다음으로는 1996년 겨울 미 서부 여행 때 본 그랜드 캐넌인데요, 이 두 곳은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더군요.”한다. 어지간해서는 이런 감탄과 감동어린 말을 하지 않은 아내이기 때문에 나도 다시 한 번 이 조국의 위대한 산하대지를 묵도(默禱)하는 심경으로 바라다본다.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중국의 요동 벌을 바라다보면서 우리 조선의 금강산 비로봉과 더불어 “여기가 바로 한바탕 울어 볼 장소가 아니겠는가?”하고 절규했다던 기록이 생각난다. 그 울음은 비견하고 표출할 수 없는 감동이 터져 나올 때의 통곡일 것이다.
한편 10월 중순, 이즈음이 공룡능선 등정의 최성수기로 알려져 각처에서 몰려든 산꾼들로 무척 복잡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길을 제외하고는 별로 붐비지 않아서 좋다. 대부분 젊은 산꾼들은 우리가 매고 있는 등짐의 서너 배가 되는 배낭을 지고 있어서 그 젊음의 활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저들은 날이 저물면 그냥 아무데나 비박하거나 노숙할 것인가. 국립공원에서는 무단으로 야영하지 않게 돼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서로 간 가벼운 목례나 경우에 따라서는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를 잊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서로 간에 이런 한 마디는 큰 힘이 되는 상생의 효험을 자아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땀에 절인 아내의 얼굴이 술 한 잔 한 것처럼 발그레하다. 건강한 안색이다. 드디어 마등령을 타게 된다. 지금까지의 공룡등뼈 같은 길이 아니라 말 잔등 같이 평온해지는 길이다. 다리의 힘이 점점 풀려간다. 금강굴을 거쳐 비선대까지는 급경사다.
소공원을 거쳐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 쯤 됐다. 줄잡아도 10시간 30분 걸린 셈이다. 다 내려와서는 아내가 무릎이 새큼거린다고 한다. 내 욕심에 눈이 멀어 아내가 무릎을 상해서 불편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느 80대 산꾼이 방송에서 호소한 게 생각난다. 본인이 산을 좋아한다고 아내를 다그쳐 억지로 산행을 일삼다가 결국 아내가 무릎을 다쳐 이제 그 좋아하던 산행은커녕 옴짝달싹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얘기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무릎 같은 아낄 것은 아껴야 한다고, 그래야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7번국도로 일로 남으로 달리는데 동해안에 곳곳이 느닷없는 월출(月出)이 연출된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곳곳이 출몰하는 오징어배의 집어등 불빛이다. 나는 졸음이 막 쏟아지곤 했지만 오징어 배 불빛 따라 남녘으로 급행이다. 저녁 9시 전까지는 고향에 꼭 도착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마음이 먼저 달려간다. 2022.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