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그날의 산행일기, 지리산 천왕봉 일출 2

청솔고개 2022. 4. 21. 01:38

                                                                                               청솔고개

2008. 8. 23. 갬.

   우리 부자는 그 새벽에 묵묵히 일출을 위해 천왕봉을 진격하고 있었다. 우리 부자간에서 그때까지 가장 깊은 대화와 소통의 두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드디어 철쭉과 진달래 떨기나무로 울타리처럼 갈라진 길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암실에서 필름을 인화할 때 희석한 정착액을 풀어놓은 바트의 인화지에 흑백의 그림이 서서히 드러나는 듯한 신비함이 있었다. 때로는 고사목이 마치 유령처럼 출몰하기도 했었다. 드디어 남쪽으로 살짝 치우친 듯한 쪽에서 희뿌연 기운이 번져 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합일한 데서 솟아나는 어떤 기운과 같았다. 우리는 긴장해서 흐르는 땀과 새벽안개가 이슬로 돼서 생긴 축축함을 구분할 틈도 없이 물에 흠씬 젖어버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안개바람이었다. 안개가 휘몰아치는 형언할 수 없는 귀기(鬼氣)마저 느껴지는 묘한 바람이었다.

   문득, 내 청춘 시절 20대 후반 바로 군대에서 제대한 후 그해 여름 8월초 소백산의 새벽이 떠오른다. 당시 순흥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 일찍 죽계계곡, 석문암계곡으로 한더위에 계곡물에 몸을 식혀가면서 등반을 했다. 그날 국망봉을 다녀와서는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 능선 바로 아래에서 자리를 잡았다. 20여 미터만 내려가면 밥 지어 먹을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A텐트 안에서 삼베홑이불 하나로 벌벌 떨다가 이웃 텐트에서 얻어 마신 고량주 한 잔으로 추위를 버티었다. 자는 둥 마는 둥하다가 새벽이 일어나서 비로봉, 연화봉, 희방폭포 방향으로 해서 하산하는데 내 생전 미증유의 안개와 바람의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목도하였던 것이다. 안개, 바람, 구름, 햇살, 이슬, 가랑비가 번갈아 몰아치는 능선 길은 때로는 미친 여자의 치맛자락이나 산발한 머리채 같다가도 때로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에 민들레 웃음 짓는 담벼락 같기도 했었다. 그날 새벽도 역시 능선 길 양 옆으로는 내 키만 한 철쭉나무들이 울타리가 돼 길을 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그런데 안개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추위를 느낄 정도다. 통천문(通天門) 바위를 지나는데 휙 바람이 불어들면 엷은 커튼이 걷히듯 천왕봉의 암괴가 출몰하곤 한다. 이상하게도 인적이 없다. 오늘 비가 올 것을 예견하고 모두들 지레 포기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안개 사이 천왕봉 상상봉 바로 밑에서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린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소리는 무슨 노랫가락 같기도 하고 휘파람 같기도 하였다. 나는 뭔가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안개바람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올랐다. 이미 박명(薄明)은 주위를 감싸고 있었으나 갑자기 출몰한 요상한 분위기에 일출에 대한 관심은 옮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먹물 옷을 입은 한 스님이 결가부좌를 튼 채 염송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더니 합장을 하고 아는 체 한다. 나도 합장을 하고 예를 차렸다. 그때까지 여기에는 우리 부자와 그 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서쪽 산하를 바라보니 아무 것도 없고 아직 운해만 솜털을 펼쳐놓은 듯하다. 그래도 운해 끝의 박명은 더 밝고 붉은 기운으로 분명히 바뀌고 있었다. 그 스님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력을 주절거린다. 특히 인도까지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강조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현실 불교계에 대한 많은 불만을 털어놓는다. 우리는 주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좀 있다가 그가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우리 보고 곡차(穀茶) 가진 것 있으면 한 잔 달라는 것이다. 마침, 우리는 이 천왕봉에 오른 후 정상(頂上)주 하려고 준비해 놓은 과실주가 있어서 같이 건배했다. 이 스님이 불법의 세계에 몸을 의탁해 있으면서도 아직도 얼마나 많은 번뇌를 끊지 못하고 있는가 싶어 오히려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스님은 지니고 있던 빵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안주와 반주를 곁들인 셈이다.

   드디어 운해가 서서히 걷힌다. 이를 두고 천지가 개벽(開闢)한다고 할 만하다. 광활한 산하대지가 장막(長幕)이 열리듯 펼쳐진다. 비로소 따끈한 8월 하순의 햇볕이 우리를 어루만져주고 있다. 해는 벌써 한 뼘 정도 산위로 솟아 있었다. 저 산 밑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아야만 일출 보았다고 할 것인가. 지리산은 아침 세수를 한 듯 해맑아진 얼굴로 우리를 보고 웃고 있다. 그 낯과 목덜미는 아직도 물기가 서려있다. 아직 추운 기운이 여전해 새벽안개, 바람과 이슬을 피하려고 덮고 있던 비닐 우의를 벗을 수는 없었다. 우리 부자는 어깨동무를 하고 스님에게 기념 촬영을 부탁했다. 그 사진에는 우리가 입은 비옷이 마치 새벽안개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날 종일 백무동 코스로 해서 하산했다.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천만의 계단으로만 이루어진 하산 코스에 우리 부자는 그냥 녹초가 다 돼 버렸다. 내 양 무릎이 모두 탈이 나서 절뚝거리니 아이가 말없이 내 짐을 다 진다. 우리는 백무동 탐방지원센터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주차해 놓은 성삼재 휴게소 주차장까지 원점회귀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운전했다. 차 안에서 아이는 지쳐서 정신없이 잔다.

   집에 다 와서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정말 아까는 나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차마 힘든다고 말은 못하고 대한 육군병장 박격포소대 분대장 군인정신 폼 잡는데 솔직히 죽을 뻔 했습니다. 아버지 짐 서너 개를 제가 다 들었던 건 설마 잊지 않으시겠죠?” 그런 아이한테 무척 고맙다.    2022.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