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다시 유월 4, 내 생애의 어느 하루 1985. 6. 9. 일, 2

청솔고개 2022. 6. 17. 01:21

                                                                                                                           청솔고개

   1985. 6. 9. 일, 2  고인이 내게는 사촌 동생이라고 해서, 그렇다고 다 컸다고 해서 술이나 한 잔 나누고 진지한 인생사에 대해 조용히 대화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그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우선 나이 차가 나서 거의 띠 동갑이었고 종제가 성인에 접어들었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날 기회가 그만큼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상 가고 나니 집안의 맏형으로서 이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종제가 입대한다고 큰집에 다니러 왔다가 갈 때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ㅎ아, 군에서 부디 몸조심해라. 휴가 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내가 내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때 그렇게 보낸 게 가슴이 아프다. 다만 아내에게 얘기해서 종제가 입대하는데 여비라도 좀 전해라고 해서 여비를 조금 전했던 게 그나마 후회의 염을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 때 만나서 더 살갑게 인사 나누고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좀 더 넉넉하게 여비라도 챙겨주면서 종방 간의 정의라도 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막상 가고 나니 온갖 마음이 다 든다.

   “2년 동안 잠바 하나로 보냈더라.”, “용돈 2만 5천원 줬더니 반만 쓰고 반은 저축했더라.” “그날 밤에 ㅎ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라. 아마 집이 그리워서 그랬던 것 같아.”, “그 아이가 국군의 날에 태어나서 현충일에 간 셈이지. 그게 그 아이의 운명인가 보다.”, “너무나 착하고 아깝고 안타까워…….”하고 숙모님과 숙부님은 번갈아 가면서 말씀하셨다.

   앨범을 들춰서 고인의 어린 때 모습을 보았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그 시절이 굽이굽이 회상이 된다. 얼마나 선량한 인상이었던가. 돌 때 사진에서부터 졸업 사각모를 쓴 의젓한 모습도 다시 보았다. 숙부님은 괴로워서 더 이상 못 견디실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한숨도 짓고 불안하게 서성이면서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는 표정이셨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지…….”하신다. 종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징집입대까지는 공백기가 있어서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해군에 자원입대하라고 종용한 장본인이 숙부님이라고 하셨다. 숙부님은 그 권유로 인해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후회와 자책으로 더 큰 괴로움에 빠지고 있으셨다. 고인이 사용하던 책과 옷을 태운다고 한곳에 뭉쳐 놓은 것도 보았다.

   나도 두 분의 이 괴로움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이제는 이런 상황을 피하고만 싶어졌다. 헤어질 때 두 분의 손을 잡고 그래도 힘내시라고 말씀 드렸다. 둘째 종제 ㄱㅊ에게도 손잡으면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대문간까지 배웅 나오신 숙모님은 “잘 가거라. 질부가 몸이 무겁다하면서……. 참 다행이다.” 한편 숙부님은 이층 창문으로 내다보시면서 부르짖듯이 인사를 하셨다. 애처럽고 민망해서 차마 눈 뜨고 못 볼일이었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큰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목이 쉬셨고 몹시 지치신 것 같았다. 종제 장례식에 다녀오시느라 너무 무리를 하신 것 같으셨다. 어머니의 모습을 뵈니 “ㅎ이의 해군 장례식 절차를 엄수하면서 그래도 태극기로 감싸서 관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그게 그리 큰 위안이 될 수가 없더라.”고 하신 숙모님의 말씀이 귀에 남아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종제의 죽음을 애써 운명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말할 수 없이 허망한 일이라서 먼 훗날 어떤 죽음이 나의 주변을 감쌀지라도 이 일은 중요한 내 인생의 한 사건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다. 이어진 작은 감정이나 느낌마저도. ‘어린 영혼이여, 부디 안식이 있으라.    2022.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