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무엇이 나의 이 삶을 견디게 하는가 2

청솔고개 2022. 6. 20. 05:20

                                                                                                                            청솔고개

   무엇이 나의 이 삶을 견디게 하는가? 아버지와의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은 내게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서른 살 중반의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맏아들인 내게 참 많은 기대를 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 아주 귀한 그림책들을 구해서 같이 보면서 내게 읽어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내용은 미국 대통령 링컨의 젊은 시절 어느 날, 진창길에 마차를 타고 오르다가 맞은편 행인에게 양보하는 장면이었다. 아마 링컨의 양보심, 그 미덕을 보여주기 위한 한 장면 같았다. 거기서 나로서는 그림에서 처음 본 링컨이 쓴 톱 해트가 참 신기했었다. 마치 사랑방의 큰할아버지가 가끔 쓰시던 갓과 같은 형태인데 그 높이가 더 길어보였었다. 물론 말도, 마차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더구나 볼이 움푹 팬 링컨의 젊은 시절, 진한 구레나룻이 아주 인상에 깊이 남아있었다. 링컨의 그림책에서 드러난 그러한 배려하는 마음이 평생을 두고 얼마나 크게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 자전거 안장 앞에 어린이용 시트를 장착해서 나를 태우고 마을에서 마을로, 길에서 길로 참 많이도 데리고 다니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전거는 그 당시 아주 소중한 이동수단이었다. 한 마을에도 몇 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맏아들인 나를 태우고 다시시는 걸 참 좋아하신 것 같았다. 연년생인 우리 꼬맹이 둘도 이때 나이쯤 앞 뒤 하나씩 태우고 큰집을 오간 적이 많았다. 이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뒤의 짐실이에 탄 첫째가 혹 졸지나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졸다가 달리는 자전거에서 그냥 떨어지거나 아니면 아이 발이 달리다가 도는 바퀴살에 끼어 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꼬맹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달릴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를 태우시던 기억을 떠올렸었다

   한 번은 한여름 날이었다. 아버지의 자전거에 이렇게 동승해서 강 건너 토마토 밭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아버지가 먹어보라고 해서 난생처음 맛본 토마토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건 단맛도, 신맛도, 그렇다고 해서 고소한 맛도 아닌 너무 닝닝한 맛이었다. 베어 먹다가 뱉어내지는 못하고 억지로 삼켰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나는 자라면서 한참동안 토마토를 먹지 않았다. 먹으면 바로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같이 최초로 성내(城內)에 있었던 극장에 같이 가 보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극장이라는 신문물이 주는 흥미도 흥미였거니와 영화가 시작되자 나타나는 타이틀백에 배경 음악이 깔린 그 화면에서 받았던 문화충격이 어제같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생애 최초의 체험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대학시절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하숙집이나 나중에는 내가 묵고 있는 야학 기숙사에 다니러 오시곤 하셨다. 아직 마흔 초반의 젊은 아버지는 큰아들과 동행하는 걸 참 좋아하신 듯했다. 우리는 변두리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짬뽕을 시켜 먹으면서 배갈을 반주로 낮술 한 잔 곁들이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식사 후 우리는 으레 근처를 산책했었다. 논둑이든 골목길이든 못 둑이든 우리 부자는 나란히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많이 남을 때는 변두리 극장에 가서 한참 철 지난 영화를 아버지와 같이 보았던 기억도 있다. 극장 안은 낮에는 관객이 서너 명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아주 친한 친구 같으셨다. 나와 안면 있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보고 아버지를 큰형님인가 하고 물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나는 우리 아버지라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그러면서 왠지 그런 젊은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지곤 했다.

   아버지와의 빛나는 이러한 순간들이 평생을 두고 내 삶을 견디게 한다. 지금도 요양병원에서 퇴원의 기약도 없이 지내시는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시다.    2022.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