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의 봄/일생동안 단 한 순간 스쳐간 사랑도 그 의미를 부여하면 한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봄
청솔고개
여행 3일째. 아직까지도 시작에 불과. 10일이나 남은 여정(旅程)을 생각하니 무슨 부자라도 된 것 같은 심경이다. 그러나 만 하루 만에 이 모스크바를 떠나려하니 마치 톨스토이, 고골리, 푸시킨, 체호프,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아득함 같은 걸 진하게 느낀다. 정말 아쉬운 마음으로 모스크바를 떠난다. 이 거장 역사의 도시를 단 이틀도 제대로 머물지 못한 게 참 아쉽다.
엊그제 내렸던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탔다. 얼마 안 있어 내 문학적 영감의 큰 줄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 코스는 열차로 통과하는 게 더 좋다고 여행 안내서에서 설명해 놓아서, 다음에는 꼭 그렇게 와 보고 싶다. 나 혼자만의 길이었다면 하염없이, 정처 없이 이 거리 곳곳을 철 따라 다 걸어도 보고 겪어도 보련마는 지금은 동행이 있다. 삶에서 동행이 필연적인 것처럼. 지금은 내가 이를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내, 언제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러 여기 올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진눈개비 내리는 겨울이면 더 좋겠다. 이 도시의 운하 다리를 밤새 걸어보고 싶다. 「백야(白夜)」에 나오는 창백한 몽상가(夢想家), ‘나’, 그 청년처럼. 진눈개비로 질벅거리는 다리에서 「백야(白夜)」의 그 처녀 ‘나스첸카’를 기다리면서. 그래서 진정한 여행은 홀로의 길이어야 하나보다. 허나 지금은 마련일랑 떨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 이 순간, 이 거리, 여기 동행하는 친구들만 생각하자.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봄이다. 주위는 넓은 집들, 큰 강, 성채 같은 건물들이 보인다.
여기는 나의 필생의 화두(話頭)였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고향. 현재 기온은 4도에서 12도로 나타난다. 날씨마저 화창하다. 여정을 돕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서 내려 여름궁전 가는 길은 한없이 평화롭고 한가하다. 샛노란 민들레꽃 밭이 너른 들녘을 수놓고 있다. 북위 60도, 여기 북국에도 봄은 오니, 꽃이 피어 있다. 널려 있는 민들레가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아준다. 오후엔 비가 약간 뿌린다. 『백야』의 진눈개비 흩날리는 네바 강이 아니다. 비에 젖은 네바 강변과 다리는 또 다른 객수(客愁)를 자아낸다. 이집트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옮겨왔다는, 그래서 이곳하고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을 법한 스핑크스 석상을 배경으로 생애의 한 순간을 기록했다. 네바 강 다리와 건너편 오른쪽 에르미타주 박물관, 일명 겨울궁전을 넣어서 포즈를 취했다. 좀 지나니 로스트랄 등대가 나타나고 그 뒤로 성 이삭 성당의 금빛 지붕과 옆으로는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가 보인다. 이어서 네바 강 지류 운하를 따라 그리스도 부활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을 찾는다. 마법의 성 같이 화려한 모자이크 문양으로 장식된 게 무척 이국적이다.
이 모든 풍광이 아무리 이국적이고 멋져도 다음의 내 인식과는 바꿀 수 없다. 나는 이 『백야』의 도시에서 상념을 이어간다. 『백야』에서 주인공 ‘나’, 26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년은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차원 높은 승화를 단 나흘 동안 이루어낸다. 그 나흘의 마지막 날 밤, 그 사랑은 볼에 단 한 번의 입맞춤하고 약혼자에게로 달려간다. 바로 다음날에는 결혼한다는 편지를 부쳐온다. 이 작품은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의 본질과 그 이중성에 대한 깊은 고뇌가 축약돼 있다. 당시 주인공과 꼭 같은,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이 세계에 바로 빠져들었었다. 헤어나지 못하고, 나도 몽상가처럼 하고 그 주인공이 돼 밤거리를 혼자 걸어보곤 했었다. 그래서 나도 그처럼 마음의 심연을 파고드는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평생 간직하게 된 것이다. 혼란 그 자체인 나의 정신세계와 동반했던 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그 작가가 평생 화두(話頭)였던 나는, 나만의 또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세계를 꿈꾸고 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은 이때부터 싹텄다. 누구는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에 작가되기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지금 무엇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작품의 두 남녀가 백야를 함께 보낸 날짜만큼, 단 나흘 동안이라도 이 도시에서 백야를 보내 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길은 안 된다. 참 안타깝다. 이 순간 일생동안 단 한 순간 스쳐간 사랑도 그 의미를 부여하면 한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내 일생이 소중하기 때문에, 적어도 나에게는. [2016. 5. 16. 월. 러시아, 북유럽 여행 3일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인상을 중심으로 기록함.] 2020.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