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끝없이 이어진 길/보일 듯 말듯한 지평선이, 키 큰 나무로 가려진 대 평원을 쉼 없이 달린다
청솔고개
2020. 5. 20. 19:44
끝없이 이어진 길
청솔고개
새벽 5시에 기상.
여행 중에는 늘 식사 시작 두 시간 전에 깨야 안심이 된다.
이 호텔 객실이 1,200 여개 된다는 말 그대로 미로 같기도 하고 달팽이 속 같기도 하다.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게 참 어렵다.
모두들 식사하러 왔다 갔다 하는 데 헤맨다.
호텔 아침 식사는 늘 멀리 떠나는 여행자의 설렘이 배여 있다.
날이 어제와는 달리 아주 청명하다.
대신 좀 쌀쌀하다.
어제 비 온 뒤라서 그런 것 같다.
긴 소매 티셔츠나 남방셔츠가 필요하다.
길가 민들레꽃밭의 민들레가 더욱 샛노래 보인다.
네바 강의 물빛은 그냥 청록 빛으로 넘실댄다.
먼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네바 강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들이 뛰 놀던 늪지대에 축주한 요새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 건설했다.
요새를 짓기 전까지는 일대가 습지여서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으므로
이 요새 건설은 이 도시가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요새 문을 통해서 들어가 본다.
광대한 규모이고 광활한 광장이 있다.
그 길옆에서 정겹고 낭만적인 네바 강을 만날 수 있다.
이 문은 ‘죽음의 문’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처형 직전에 이 문을 통해서 여기 수용된 정치범에게
마지막으로 네바 강을 한 번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바로 뒤로 보이는 네바강변에 세워진 성벽의 두께는 8미터에서 12미터로 육중하고 견고해 보인다.
멀리 뒤로 겨울궁전, 에르미타주가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근처 붉은 색을 띤 나리시킨스키 요새를 뒤로하고 나오니
샛노란 민들레꽃들이 탐스럽게 자란 풀밭을 수놓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도 있다.
10시 좀 지나 드디어 햇살에 환히 빛나는 네바 강의 화려하고 예술적인
트로이츠키 다리(삼위일체교)를 건너 에르미타주로 향한다.
어제 비온 뒤라서 네바 강의 물빛과 그 뒤 뭉게구름이 더욱 맑아보인다.
그 사이로 봄 햇살에 빛나는 가로등의 행렬이 아주 클래식하다.
에르미타주박물관을 찾았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힌다.
5개의 건물로 돼 있다.
1층은 주로 러시아,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 문화 유물이,
2층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등 서유럽의 유명작품들로이,
3층은 마티스, 고갱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도 있다.
300만 점 이상에 달하는 소장품 중 일부가 현재 100여개 방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한 작품에 1분 정도 본다 해도 다 보는 데는 8년이 걸린다고 한다.
솔직히 난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흥미가 없다.
여태까지 예술품에 대한 안목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모든 사람이 다 그 안목을 키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도 보려면 충분한 준비를 하고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봐야 할 텐데,
이 많은 예술 작품을 한 나절 만에 다 둘러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나를 사로잡는 한 작품에 내 눈이 꽂혔다.
이 미술관에 다수의 작품이 보존돼 있는 벨기에의 화가 루벤스의 ‘로마의 자비’라는 작품이다.
감옥에 갇혀서 굶겨 죽이는 형벌을 당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몰래 딸이 젖을 먹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가슴이 뭉클하다.
다 떠나서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동서를 막론하고 진한 감동을 준다.
이 작품 하나 앞에서 느낀 감동만으로도 이 박물관 관람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후, 여기서 마지막 시간.
거리의 이국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기념물, 건축물이 그냥 휙휙 지나가 버린다.
참 아쉽다.
여기가 거기 같고, 이미 와 본 것 같기도 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와 네바 강 다리와 그 다리의 장식물들.
누군지 알 수도 없이 거리 곳곳에 세워진 청동 인물조각상들.
멀리 화창한 5월의 봄 하늘에는 뭉게구름마저 피어나고
따스한 햇살은 나그네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져 준다.
넵스키 대로를 거쳐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야 한다.
파리의 개선문과는 정 반대 개념이랄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개선문을 지난다.
러시아가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다.
녹색 기둥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 역사적인 전쟁으로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곳을 지나려니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812년’ 속의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어제 내려서 보았던 이삭 성당 앞을 지나간다.
근처에 청동기마상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바위 위에 앞발을 들고 뒷발에만 의지한 체 서 있다.
이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이 말을 타고 오른손으로 네바 강 가리키는 모습이다.
앞발이 들린 높이는 황제의 권위를 뜻하며,
말의 뒷발이 뱀을 밟고 있는 것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상징한다.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의 대표작 중 하나인 대서사시 ‘청동의 기사’는
바로 이곳의 청동 기마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만 하루 남짓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마치고 오후에 홀홀히 또 길을 재촉한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 에스토니아의 타린 시로 간다.
나는 어제 뿌린 진비 만나
여기 북국의 음울한 기분은 좀 느껴 보았던가.
이들의 문학 작품에서 언제나 느껴졌던 그런 독특한 분위기.
그 고뇌하는 얼굴은 보았는가.
여행지는 맑으면 맑은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그 정취와 느낌이 있는 법.
잔뜩 흐리거나, 세찬 바람 불거나 펑펑 눈이 내리는 날씨를 길 위에서 만나는 것도
결국 그 다양하고 살아 있는 민낯을 마주하는 것.
내가 일삼아 빠져보기를 기대했던 그들 소설 작품의 배경, 분위기, 기분을
단 한 점이라도 느끼고 떠나는가.
오늘은 정녕 봄 날씨 그대로다.
모두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관람의 쇼크로 심신이 피곤한지 잠에 빠져든다.
이 순간 나의 여행 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4일째, 17:10,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에스토니아 국경으로 난
일망무제로 이어진 길을 끝없이 달리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들의 조국 러시아.
대지에는 5월의 햇살이 내리 쬐고
나는 다소 몽환적 기분에 젖어 대지의 정령을 쫓아간다.
이 자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천혜의 그 땅, 또 다른 버지니아.
거기서 사로잡혔던 그 때의 느낌이 다시 솟구친다.
부럽다 못해 거의 치명적이고 절망적이기까지 한 대지의 풍요함이여!
푸시킨의 고향, 그 백야의 아득한 광휘, 이 순간을 난 영원히 기억하리로다.
이렇게 떠나면 저녁엔 에스토니아 초고속 페리호 타는 곳에 닿으려나.
또 다시 부서지는 역광의 구름너울.”
그대로다.
내가 난 난생 처음 이 북유럽,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 길,
보일 듯 말듯한 지평선이, 키 큰 나무로 가려진 대 평원을 쉼 없이 달린다.
맑고 푸른 하늘에 더욱 화사한 솜털구름, 찬연한 햇살,
풍성한 수양버드나무 숲, 끝없이 이어지는 민들레꽃밭,
유채꽃밭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
깨끗하게 꾸며진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군데군데 몽글몽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오후 6시 쯤, 성벽이 길게 늘여져 있고 망루가 보인다.
이제 대평원은 끝나고 도시가 시작된다.
1시간 넘게 더 달리니 드디어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국경에 이른다.
에스토니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나라로
육로로는 유로라인 버스로 7시간 정도 걸린다.
북으로는 핀란드, 동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라트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발트 3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는 불과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 두 도시는 2시간 남짓 걸리는 쾌속 페리로 연결된다.
구소련의 해체로 생성된 이 나라는
그 역사적인 유산으로 러시아인의 인구 비중이 25%나 된다.
러시아어가 에스토니아의 제2언어이다.
에스토니아는 지정학적으로 강력하고 호전적인 독일,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등
이웃 나라에 둘러싸인 까닭에 지난 800년 가운데 겨우 30년 동안만 독립국으로 있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불우하고 기구한 민족이다.
드디어 탈린 시에 도착했다.
핀란드 만을 끼고 헬싱키와 마주보고 있는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다.
우리의 시골 도시 같이 정겹게 느껴지는 풍광이다.
이름이 ‘SUSI’라는 호텔에 들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이 그냥 소박한 숙소다.
1층 숙소에서 바깥마당이 그냥 보인다.
부담 없이 편안한 주변 풍광이다.
[2016. 5. 17. 화. 러시아, 북유럽 여행 4일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에스토니아 국경으로 난 길의 풍광을 중심으로 기록함.] 2020.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