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삼월 초하루 즈음 2/ 한 잔씩 나누는 자리에서 가장 물리지 않는 안주가 바로 그 시절, 중학교 1년, 까까머리 시절 이야기다

청솔고개 2023. 2. 24. 22:52

                                                               청솔고개

   우리는 그야말로 청운의 뜻을 품고 입학했다. 새 출발이다. 입학식을 마치고  학교 동산에 세워놓은 설립자의 동상을 참배하고 그 아래서 반별로 입학기념 촬영을 했다. 까까머리에 3학년까지 입는다고 크게 맞춰서 잘 맞지 않는 교복을 입은 사진이 앨범에 실려 있다. 한껏 바래져 있고 누렇게 떠 있다. 마치 낡은 문화재처럼 들어붙어있는데 돋보기를 들이대고 자세히 보아야지 그냥 보면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훈련복에 똑 같이 깎은 머리, 언뜻 보면 모두가 똑 같이 생겨 보이는, 마치 육군 훈련소 훈련병들의 단체기념 사진 판박이다.

   입학 후 학과 수업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시간은 생물과 국어였다. 생물 교과서 초반부에 사계절 풀과 꽃의 이름과 분류 체계가 나왔다.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봄꽃과 여름풀들의 나뉨이 학과 공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좀 신기했었다. 넘보라살, 넘빨강살, 흰피톨, 녹말만들기, 잎파랑이, 해굽성 등의 과학 용어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한흑구 수필가의 ‘보리’라는 글이  잊어지지 않는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을 통해 글이 주는 이끌림에 빠져들게 되었다.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보리’의 이 부분에서 내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느꼈었다. 어린 나이, 어린 마음에 자연이 주는 힘, 문학의 힘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해 주었었다. 감동이라는 게 이런  거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자주 전문을 소리 내어 큰 소리로 낭송도 해 보았다. 그러면 마치 노래를 부르는듯, 시를 읊는 것 같은 율동감이 있었다. 한없이 여려 보이는 보리에서 알 수 없는 큰 힘도 느꼈다.

   여러 과목 교과서에 등장하는 당시의 용어들이 떠오른다. 지금보다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대개 순 한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말본, 이름씨, 움직씨, 매김씨, 홀소리, 네모꼴, 꼭짓점, 높새바람' 등 아직까지 입에 남아 있다. 아마 한글 전용, 국한문 혼용 논쟁 중 한글학자 최현배님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고향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그때의 친구들을 본다. 한 잔씩 나누는 자리에서 가장 물리지 않는 안주가 바로 그 시절, 중학교 1년, 까까머리 시절 이야기다. 우리들의 꿈과 청춘이 싹 틔어 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2023.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