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2/3)/ 서너 발이나 됨직한 느티나무 그늘에서 오랜만에 밀렸던 대화를 나누는 저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청솔고개 2020. 5. 28. 21:21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2/3)

 

                                                                                                                   청솔고개

   아버지의 갑작스런 전근으로 나만 남고 부모님은 근무지로 살림을 옮겨 가셨다. 남겨진 나에게는 그 한두 달 동안 많은 일이 발생했었다. 그건 나로 하여금 새로운 기분을 체험하게 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우리 마을 열넷 악동(惡童)들은 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이 언덕배기에 날마다 모여서 그럴 듯한 사업(?)을 구상하고. 또 그것이 주는 황당(荒唐)함과 상상력을 즐기곤 하였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떼로 모여서 마을 점방(店房) 개업 구상도 하고, 때로는 동네 아동 극단(劇團)을 모아서 연기 활동도 흉내 내곤 하였던 것이다. 부모님이 부재중인 우리 집 빈방에 모여서 이불 홑청을 막(幕)으로 삼아서 무대를 꾸몄다.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연극 대사(臺詞)를 외고 연기 연습도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호롱불로 밝히던 시절이다. 밤에는 이불 홑청만으로 방문을 가려도 불빛이 새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방에 혼자 계시던 증조부님도, 큰방에 계시던 조부모님도 모르셨던 것 같았다. 아니면 맏손자가 하는 일이라 다 이쁘게 보고 모른 척하셨던가. 이런 연극연습이나 또래들과의 다소 거친 여러 갱 집단 행태에 대한 그분들의 별다른 참견이나 제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을 점방(店房) 사업(事業)의 전말(顚末)은 이렇다.

   그때 우리 마을에 가게가 없어서 무척 불편하였다. 그래서 가게 개설은 우리의 숙원사업이었다. 우리가 한 번 차려보자, 돈 많이 벌 꺼야 하면서 계획에 열을 올렸다. 몇 차례 회합 후, 드디어 점방을 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모두들 점방 개업 자본금(資本金) 출연(出捐) 때문에 고심을 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어른들에게 말씀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 보나마나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우리 집 뒤안간 ¹차곳독에 들어 있는 쌀을 몰래 퍼내는 거사를 감행했다. 그런데 쌀 퍼내는 데만 급급해서, 주변에 흘린 쌀알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었다. 아뿔싸, 이건 불상사다. 나는 안절부절 못했었다. 조부모께서 은근히 나에게 혐의(嫌疑)를 두시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최초의 위기(危機) 상황이었다. 이런 불안한 분위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이즈음 내게 닥친 또 다른 위기 상황 하나.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난 분이 우리 담임교사가 된 사건이다. 그 선생님과의 맞닥뜨림은 악연(惡緣) 중에 악연이었다. 이때는 우리 아버지라도 학교에 계셨더라면 은근히 그 백(?)에 기대기라도 하였을 텐데 하는 것이 당시 솔직한 나의 심경이었다. 학교에서도 늘 불편한 분위기다. 학교도 가기 싫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불안 불안한 나날이 흘러갔다.

   다음은 그 시절만 생각하면 반드시 떠오르고 친구들과 평생 ²울궈먹는 무용담(武勇談) 하나.

   학교 울타리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언덕 아래, 땅벌의 소굴이 있었다. 하루는 학교 갔다 오다가 한 친구가 땅벌에 공격을 받고 쏘여서 얼굴과 목덜미가 거의 ³울뭉치 꼴이 되었다. 동무의 참상(慘狀)(?)을 보고는 모두 분기탱천하여 분연히 그 원수를 갚아주기로 하고 나선 것이다. 몇날며칠의 치밀한 작전회의를 거친 뒤에, 칠흑의 한 밤에 작전은 감행되었다. 떼적을 진압하기 위해 두꺼운 돌가루종이를 뒤집어쓰고 일단 화공(火攻)으로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나갔다. 화공 격파(擊破) 작전을 계획한 것은 마을 어른들이나 형뻘들의 오랜 경험에서 울어난 조언 덕이었을 것이다. 벌떼들의 땅속 아지트, 땅벌 집은 불타고 파헤쳐져 섬멸되었다. 작전은 일단 성공했다. 이 이야기는 그 후 60년 가까이 이어오면서 화자(話者)에 따라 내용이 더 보태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며 윤색(潤色)되어 갔다. 그 원본이 어느 것이며, 이본이 몇 종이나 되는지 모른다. 필경, 전설 같은 영웅의 무용담으로 각색(脚色)되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즈음, 나는 무슨 기적이나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나 기대하면서 한 시라도 빨리 이 싫은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들었다.

   내게 이즈음 한두 달의 달콤한 자유(自由)와 방종(放縱)(?)을 맛보게 한, 우리 부모님과의 이산(離散)상황이 급작이 종식된 것이다. 저쪽의 살림이 안정을 찾자, 부모님과의 상봉(相逢)과 합가(合家)가 정해진 것이었다. 위기 상황은 싱겁게 해결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많은 과제(?)를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졌다. 이는 나의 안태(安胎) 고향을 떠난 최초의 내 생애 기록이다. 삶의 이정표(里程標)는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이는 내 생애(生涯) 역사(歷史) 중 최초의 이산(離散)과 단절(斷絶)의 기록이다.

   나는 가끔 그 시절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한다. 나는 대체로 어떤 아이였을까? 제법 깐지게 싸움도 걸 줄 아는 아이였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해석하는 사관(史觀)들이 있지만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사(生涯史)’라로 생각한다. 나는 나의 생애사를 기록해서 후대에 남겨야 할 사관(史官)이다. 사초(史草)와 사료(史料)를 모으고 엮어서 온전한 역사로 남겨야 한다. 시간, 공간, 영원(永遠), 우주(宇宙)는 모두 ‘내가 있음[存在]’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부재(不在)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부재(不在)다. 나는 그 자체로서 그 무엇보다도 더 위대한 세계이고 우주다. 영원이다. 이러한 우주의 중심이고 그 자체가 우주인 나의 기록에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존재론을 이런 식으로 전개한다.

   서너 발이나 됨직한 느티나무 그늘에서 오랜만에 밀렸던 대화를 나누는 저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저들 가까이 있어도 언제나 이방인(異邦人)이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인식하고, 저들과의 차이를 직관, 분석함으로써 결국 나의 존재를 완성해 가는 것이다.

[위의 글은 나의 유·소년기(幼少年期)를 회고한 것이며, 2002년 5월 말에 쓴 것임, 앞으로 몇 차례 나누어서 실을 것임.]

                                                                                                 2020. 5. 28.

 

[주(注)]

뒤안간 : ‘뒷간’의 토박이 말

¹차곳독 : ‘쌀독’의 토박이 말

²울궈먹는 : ‘우려먹는’의 토박이 말

³울뭉치 : ‘멍게’의 토박이 말

돌가루종이 : ‘시멘트 포대’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