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다시 빈집에서 5/ 아버지의 아흔 셋 한 생애의 자취와 기록이 당신의 부재로 인해 한꺼번에 세월의 뒤안길에 파묻히거나 태워져 흙이나 재로 영멸(永滅)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다

청솔고개 2023. 7. 29. 22:15

다시 빈집에서 5, “더 이상 역류(逆流)하지 못하는 세월이라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청솔고개

   나는 암만 생각해도 아버지의 아흔 셋 한 생애의 자취와 기록이 당신의 부재로 인해 한꺼번에 세월의 뒤안길에 파묻히거나 태워져 흙이나 재로 영멸(永滅)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최근현대사는 이렇듯 이름 없이 왔다가 이름 없이 떠난 수많은 민초들이 이룩한 피와 한의 퇴적물이다. 그들의 육신이 지수화풍으로 회귀했다고 그 정신 자료마저 영멸의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너무나 허탈하다. 이제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다.

 

   비가 온다. 더욱 세차게 온다. 화단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아진 장독 뚜껑 위에 빗물이 고였다가 옆으로 퍼져서 바로 떨어지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가. 60년 전 안태고향 큰집 장독대에서 정겹게 보던 모습이다. 그 장독대 돌 틈마다에는 분꽃과 채송화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지.

   불현듯 30여 년 전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이 큰집에서 명절이나 가족 행사 때면 당신의 증손녀, 증손자까지, 외증손자, 외증손녀들이 떼를 지어 와서 북적거리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아스라이 그 세월이 뒤돌아 보인다. 참 그립고도 정다운 시절이었다. 내가 이제 그런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나에게난 아무도 없다. 그 모두다 어딜 갔나? 참 보고 싶다. 더 이상 역류(逆流)하지 못하는 세월이라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이게 어떤 것인지 몰랐는데 지금이 바로 그것인 둣 하다. 나도 모르게 짙은 한숨이 쉬어 진다.

   피아노 있는 방 벽에는 아버지의 고동색 법사(法師)복이 걸려 있다. 그 옆에는 법사복을 입으시고 찍은 당신의 반신 사진이 큰 액자에 들어 있다. 아버지는 퇴직하시자 일찍이 통도사에서 법사 공부에 몰입하셨다. 당신께서는 생의 어떠한 허무적멸을 감당하지 못하셔서 일찍이 그 공부에 입문하셨을까? 초년에 바람처럼 먼저 가버리신 당신의 백씨 때문이신가. 아니면 우리 자식들 때문이신가. 언젠가 한 번 긴하게 여쭤본다는 게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 사진은 당신의 번뇌를 오롯이 홀로 감당하려는 듯한 비장미가 어려 있다. 아버지께서 집에서가끔씩 반야심경, 천수경을 염송하시면서 두드리시던 목탁도 보존돼 있다. 그 염불소리 초성이 제법 청아하셨다. 이런 저런 걸로 생전에 아버지께 여쭤볼 것이 참 많았는데 이제는 답을 들을 길이 없다. 지금에야 아버지 가시는 마지막 길에 이 모든 것들과 동행하시게 해드렸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아버지 가신 지 열 달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여기 빈집에 이렇게 와 있기만 해도 나만의 추모가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곡진해진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참으로 나에게도 아버지께도 참 소중하다. 이런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절실해진다.      2023.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