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춘보고서 4, 창고 업무, 공용외출
청솔고개
내가 맡은 보직은 사단 통신지원대, 본부 소속 통신 공병 수리 부속 계로, 창고 근무였다. 고교 국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에서, 느닷없이 전공과는 동떨어진 창고 근무라니, 내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제는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박 아무개 상병은 함께 업무를 같이 처리하면서 내게 잘 가르쳐 주었다.
퀀셋 막사의 창고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기도 했다. 사람이 기거하기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전까지 방치돼 있었던 창고 내부를 정리하여 팔레트를 깔고 큰 물품은 쌓아놓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 안의 물품의 재고 조사였다. 이전에는 물품 재고 카드 하나 없이 그냥 주먹구구로 처리한 듯하였다. 손가락보다 더 작은 진공관, 퓨즈 등은 칸막이 선반을 마련해서 같은 종류끼리 쌓아 놓았다. 다음은 불출 카드를 준비해서 입고, 불출의 기록을 남기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통신, 공병 장비, 부대 부동산에 관련된 소모품, 재산, 물품 대장, 지적 대장 관리는 색다른 업무였다. 아주 낯선 일은 통신 야전용 발전기 관리 문제였다. 대장과 수량이 일치되는지 점검하고 고장 난 발전기는 사역병의 도움을 받아서 트럭에 싣고 공병대에 입고 수리 의뢰하는 것이다.
창고의 업무가 체계가 잡히고 보니 자타 간의 창고 업무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갔다. 창고가 무척 분주해졌고 활성화되어 갔다. 이런 게 일을 통한 보람이라는 인식이 들었다. 나도 60만 대한 군인의 1인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도 생겨났다. 창고 보관 업무에는 지뢰탐지기 등 특수 장비도 포함됐었다.
부서에서 정비에 필요한 부속품이나 소모품을 청구하면 불출해 주는 것이, 내 일상의 업무였다. 폐배터리를 반납하면 그만큼의 새 배터리로 교환해 주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독자적인 창고를 맡다 보니 나만의 작은 사무실 공간은 확보된 셈이다. 창고에서 책상 하나 마련해서 업무를 보았다.
군조직처럼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곳일수록 휴식을 위해서라도 사적 공간의 확보가 절실함을 느꼈다. 나는 창고 근무라는 구실로 그 공간을 나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양철지붕 퀀셋 막사의 반을 막아서 만든 통신 공병 창고에서 한여름이나 한겨울은 지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심리적 압박감으로 숨 막힐 듯한 내무반보다는 견딜만했었다.
이 창고 업무는 전 부대원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 직종인 셈이다. 그만큼 업무가 미치는 영향력도 생겨났었다. 이른바 ‘끗발’ 같은 것이다. 일의 성격이 다소 자율적이라서 보람도 느꼈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났다. 창고 안에서 근무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간간이 독서도 하고 군 생활 일상에 대한 기록도 남겨보았다. 나중에는 나만의 창작품을 기획해 보는 여유도 생겼다.
부대 건물 철거에 따른 지적 관련 일로 소관 군청을 자주 출입하는 일도 매력적이었다. 일을 구실로 한 공용 출장 외출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서 외식도 즐겼다.
공용 출장 후 귀대하면서 난생처음 길가 고추밭에서 땡초를 따온 적도 있었다. 취사반에 나오는 밍밍한 국에 땡초를 으깨어 넣어 먹으니, 국의 맛깔이 확 달라졌다. 처음으로 땡초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공용 출장에서 귀대하려면 관내 여자 중고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야 한다. 교문과 운동장, 교사를 보면서 지나가면 입대 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생각나곤 했었다. 저 교실 안에서도 지금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럴 땐 문득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식으로 군 생활에 차차 적응돼 갔다. ‘도처(到處)에 유청산(有靑山)’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여기도 결국은 사람이 사는 곳, 곧 사람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곳이니 나름대로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내가 맡은 공병 통신 수리 부속의 업무가, 비록 놓치고서 그토록 애석하게 여겼던 사진반 업무와는 또 다른 면에서 점차 매력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 이십 대 중반, 군 생활 초입에서 비록 이토록 내 속을 끓이고 분노하곤 했어도, 내 생애 통틀어서 이토록 강렬하고 아름다운 청춘 보고서를 작성하게 될 줄이야 그때는 몰랐었다. 2025.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