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삼대(三代)가 떠나는 호국(護國)의 여정(旅程)(3/3)/아버지가 그때의 퇴로가 겨울 설맹으로 시력을 잃었던 설악산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했으니 이 운두령 쪽일 수도 있겠다 싶다

청솔고개 2020. 6. 14. 18:33

삼대(三代)가 떠나는 호국(護國)의 여정(旅程)(3/3)

 

                                                                                        청솔고개

   새벽에 일어나 어제까지의 여정을 기록했다.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이렇게 나의 생애를 기워나가야 한다. 이게 나의 존재의 이유, 존재하는 힘이고, 나의 팔자다. 이제는 한 숨 더 자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은 내려가면서 오대산 들린다. 거기서 좀 쉬고서 다시 남하한다. 엊저녁에는 아버지께서 밤새 뒤척이다가 이어폰으로 옛 가요를 들으시면서 흥얼거리셨다. 잠이 설쳐지시는가 보다. 그래도 잘 견뎌 주시니 얼마나 고마우신가.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 다섯 시 반 지났다. 좀 더 자야 할 것 같다. 혹 잠이 안 오면 이 마을 골목과 언덕을 좀 걸어보고 싶다. 잠시라도 추억여행을. 여기 양구면 정림리 지역사단 사령부 근처 언덕길. 잠깐이었지만, 내 열혈 청춘시절, 사단 통신대 시절을 보낸 곳이다. 내가 읍내 공용(公用) 근무 나갔다가 옥수수 밭 옆길 골목으로 돌아들면 지역의 아담한 고등학교 교문도 만나고 그 안에 운동장, 학교교사도 보였었다. 어쩌다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하교하는 모습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고 온 내 생애의 아이들을 보기라도 한 듯, 불현 듯 그리워져 가슴을 쓸어 담곤 했었다. 근무부대 가까이 오면 사단 위병소를 피해 혼자 사박사박 걷던 길도 눈에 선하다. 연로하신 아버지와의 동행이라서 아침에 여유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 이틀 밤 동안 아버지는 잘 주무시는 편이다. 다행이다.

   9시 다 되어서 숙소에서 출발했다. 양구읍내 식당을 찾아보았다. 아버지의 잇몸 헤어진 것을 고려할 때 아침 식사는 죽이 좋을 것 같다고 아이와 의견을 맞추었다. 양구 읍내에 나왔다. 내 양구시절, 청춘 시절 한 때를 보낸 곳이다. 그 때 내가 공용 완장과 가방을 차고 밖에 나와서 하는 일은 주로 군청 지적 과와 공병대 관련 일이었다. 부대로 돌아올 때는 가끔 근처 고추밭에서 땡초 고추를 한두 개씩 따서 닝닝한 시래깃국에 넣어서 먹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 때 땡초의 진미를 비로소 알았다. 이제 읍내에는 ***커피점, ****빵집 등 유명 브랜드의 가게가 즐비하다. 너무나 달라져서 내가 당혹해진다. 그땐 가끔 외박 나오면 묵었던 여인숙, 시장판 등 70년대 중반의 정겨운시골 장터 같았었는데. 아버지는 녹두죽, 난 흑임자죽, 아이는 야채 죽을 시켰다. 내가 흑임자죽을 한 공기 아버지께 떠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녹두죽을 또 떠 주신다. 아이가 녹두죽을 맛보더니 괜찮다고 평한다. 이렇게 양구읍내에서의 아침 죽 식사는 그 분위기조차 부드럽고 순한 맛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양구군 해안면 펀지볼

   이어서 바로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로 향한다. 중간 파로호 생태 습지와 한반도 모형 인공 섬이 보이는 강변에 좀 쉬면서 아침 커피를 한 잔 하였다. 아! 파로호하면 나의 육군 이병 시절로 돌아간다. 통신대 본부에서 겨울철 접어들면서 월동준비로 싸리비 엮기 위한 싸리 꺾으러 파로호변 산으로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트럭에 부식과 일종을 잔뜩 싣고 작업하면서 쌀밥과 김치로 포식하던 추억……. 그래서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도 못했던 기억만. 그 때 말로만 들었던 옆 파로호의 맑은 물 색깔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나의 청춘시절, 새파란 청년 시절의 기억. 간식과 물 준비가 안 되어서 다시 시내 마트로 가서 과자와 물 등을 샀다. 양구군 해안면, 내가 몇 년 동안 이곳에 복무하면서 한 번도 못 가봤던 곳이다. 아이는 인제 부대에서 여기까지 이동하면서 훈련을 자주 뛰었었다고 하는데……. 드디어 마치 깊고 큰 볼(bowl, 속이 깊은 쟁반)처럼 생긴 지형이 나타난다.  펀치볼 도착이다. 그 쟁반의 속과 아래는 비닐이나 검은 차양이 덮여진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여행 기념으로 먼저 이곳 특산물인 시래기를 세 통 샀다. 내비게이션 정해 놓은 대로 신고소로 가서 안내 받기로 했다. 땅굴은 볼 수 있지만 전망대는 1시를 지나야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아이도 아버지도 이 광활하고 특이한 지형에 감탄연발. 드디어 몸도 마음도 준비 완료 후, 제4땅굴로 향했다. 주변에는 비무장 지대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지뢰지역이니 출입금지 경고판이 즐비하다.

   땅굴견학 관장하는 부대 초소에 도달하여 작성한 출입서류를 보여주었다. 아이는 군복을 입은 현역들의 모습에 자못 감회가 깊은 듯하다. 아이가 그런 표정과 말투를 숨기지 않는다.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12시 50분까지 기다렸다. 홍보 영화를 먼저 보고 땅굴 견학해야한다고 해서 안보전시관에 가서 6.25한국전쟁과 양구전투에 관한 자료를 같이 살펴보았다. 아버지도 깊은 감회에 젖으시는 듯하다. 그날에 대한 회상의 나래를 펼치신다. 땅굴 탐방 출발. 현역 군인이 한 사람 앞장서고 민간인 안내 여직원이 동행한다. 서늘한 굴 속 기온이 오히려 추위를 느낄 정도다. 우리 측의 역갱도(逆坑道)는 독일제 특수 장비로 굴착해서 매끈하게 깎여 있었지만, 남하한 땅굴은 그냥 폭약과 곡괭이로 파내서 투박하다. 모노레일로 5분 정도 북쪽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뒤돌아 온다. 무려 12년 정도 걸려서 군사분계선 아래까지 파내려왔다고 하니 저들의 집요함에 놀랄 뿐이다. 이어서 을지 전망대 탐방을 했다. 전망대는 1,000미터보다 더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펀치볼이 더 훤히 내려다보인다. 설명을 들으니 민족 분단의 서글픔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민간인 통제 구역(민통선), 남방한계선, 군사분계선, 북방한계선, 김일성 고지, 모택동고지, 스탈린 고지 등 지명만도 살벌한 느낌이 든다. 맑은 날은 금강산 거북바위도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흐려서 안 보인다. 마치고 나와서 사진을 찍으면서 주변을 감상했다. 아버지는 사진과 동영상에 몰두하시다가 결국 보조배터리를 철조망 너머 아래로 떨어뜨리셨다. 매우 아쉬워하신다. 나도 솔직히 좀 아까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아이와 의논한 결국 바로 오대산 월정사로 향하기로 했다.

   월정사 가는 코스에는 아이와 의견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아이의 말을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나는 아이의 교육훈련장으로 군 생활을 온통 보내게 된 원통과 인제 산하, 내가 복무했던 같은 지역사단 예하 육군 보병 제**연대 방향을 주장했다. 그때 아이는 군 지원을 앞두고 망서리다가 아버지가 근무한 부대는 우선 입대 혜택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지원했던 것이다. 나의 아이의 군생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여기에 비롯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치열하게 복무했던 부대를 지나가게 하면서 잠시라도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런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아이는 현역시절의 복무 현장을 지나고 있었음에도 애써 무관심한 듯하였다. 감상(感傷)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듯하다. 아이의 성격이 그대로 나온다. 여기서 남긴 사진 한 장만이 훗날 기억을 일깨워 줄까.

   생태의 보고(寶庫)로 널리 알려진 방태산 옆을 지나면서 거의 1,100미터 가까운 운두령 고갯길을 넘었던 기억도 값지다. 나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체험이었다. 거의 한 시간 넘도록 달리는데 끝없이 원시 밀림이 이어진다. 미동부나 캐나다 대륙 횡단하는 어느 구간과 같은 분위기다. 지나가는 동안 차 한 대도 볼 수 없던 446번 지방도다. 이 미답(未踏)의 길에 대한 강한 인상은 큰 소득이다. 백담사, 울산바위,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나머지 6.25한국전쟁참전호국의 길 답사는 다음으로 미루어진 건 아쉽다. 이것까지는 솔직히 과욕이다. 아이 말대로 내가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넣으려고 하는 부질없는 욕심을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그때의 퇴로가 겨울 설맹으로 시력을 잃었던 설악산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했으니 이 운두령 쪽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잠 한 숨도 못자고 오대산까지 달려가서 한숨 돌렸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린 거다. 오늘 우리는 오대산 월정사 쪽으로 해서 아버지의 그날의 퇴로를 따라 달린다고 보면 된다. 월정사 전나무 숲이 가까이 보이는데 심신이 모두들 지쳐가는 저녁 7시, 고즈넉한 예불과 범종소리가 고찰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아버지는 역시 대적전에 들러 참배하시고 또 3천원을 시주하신다. 아버지의 그런 철저하심에 존경의 염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번에 아버지는 또 무엇을 발원하셨을까? 아마 70년도 더 전, 그날 퇴각에서 여기까지 당신의 무사하심에 대해서 빚을 갚듯, 이제사 부처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시는 것일까 싶다. 여쭈어 보지는 않았지만. 경내에서 나오면서 산채비빔밥으로 맛있게 저녁 식사, 주유 후, 아이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이 때 아들 덕 좀 보는 거지 뭐, 하는 생각으로.

   오징어배 집어등이 훤히 보이는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려서 집에 오니 새벽 12시 40분. 아버지가 걱정은 되었지만 푹 쉬시게 하는 것 외는 별 도리 없다. 대장정은 끝났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손자가 공유한 강원도 일대 호국의 길 탐방에는 아쉬움도 남지만.

[위의 글은 3년 전 꼭 오늘인 2017. 6.14. 아버지의 6.25한국전쟁 참전 코스 탐방 셋째 날 기록임.]   

                                                                                     2020.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