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유월의 단상4, 교단의 전설/그를 교단에서의 ‘나의 전설(傳說)’로 기억하고 싶다

청솔고개 2020. 6. 19. 17:42

유월의 단상4, 교단의 전설

                                                                                                                청솔고개

 

   군에서 제대 후 복직한 첫 해 유월 어느 날, 가정실습 기간 동안 청량산에 혼자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청량산 둘러보고 울진 불영사계곡 들러서 불영사 입구 계곡 옆에서 또 1박 했다.

   어제 하루 무사히 지낸 데 대해서 감사의 뜻과 오늘 저녁에도 부처님의 가호로 무사하게 해 주십사하고 비는 뜻에서 경내에 가서 참배를 했다. 그때 비로소 비구니들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 얼굴들에서 내게 엉뚱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그 비구니들에게 이상한 선입견 같은 것이 생긴 건 그 때부터인 것 같다. 모두들 어떤 말 못할 사연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내가 소설 쓰듯 꾸며 나간 것이다. 무슨 시적, 문학적 상상력 같은 것이었다. 그건 참 부끄러운 젊은 날의 치기 같은 것이었다.

   사흘째는 이 근처에 얼마 떨어지지 않는 바닷가에 근무하고 있다는 나의 교단의 시절, 전설의 한 선배교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물어물어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 갔다. 서무실 직원인 듯한 사람이 그 선배는 학교 태권도부 서울 대회 인솔 준비로 지금 퇴근했다고 한다. 혹 집에 계실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또 사는 집을 물어서 찾아 갔다. 사는 곳이 시장 통 입구 주택이었는데 결국 선배는 없고 부인만 있었다. 그 동안 혼인해서 아이가 났는데 아직 돌을 안 지났다고 한다. 참 아쉽고 섭섭했다. 나는 준비한 선물만 전하고 선걸음에 돌아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생애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만났다. 그 후 그 전설은 고향인 그곳에서 바람처럼 소식만 전해질 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아렴풋이 그 전설을 회상해 본다. 그 전말은 정말 첫 사회생활에서 내가 받은 제법 큰 문화 충격이랄 수 있다.

   첫 교사 발령 받은 해, 초가을이지 싶다.

   선배 교사 한 분이 군 입대를 하고 바로 그 후임으로 또 출신 대학도 교과도 같은 선배 교사가 부임했다.

   그는 당시 1미터 90 가까이 되는 거한이었다.

   나 하고는 근 15년 가까이 차이 나는 대 선배였다.

   그가 오고부터는 교무실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가 맡고 있는 수업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배꼽 잡느라고 수업을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다재다능, 팔방미인이었다. 태권도, 쿵푸, 합기도 합쳐서 15단이 넘는 무술 실력에다 기성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 수준급의 하모니카 연주 솜씨, 프로 기사 못지않은 바둑 실력, 좌중의 배꼽을 빼는 재담에다가 인물도 훤칠했었다. 나는 그 중에 하나라도 그의 흉내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려움은 있는 것 같았다. 혼인은 한 것 같은데 가정 사정이 좀 희미했었고 특히 술 만 들어가면 나는 군대를 두 번 갔다 온 사람이라고 하며 그 억울함을 토로하곤 했다. 4.19이후 혼미한 병무 행정 때문에 군에 두 번이나 끌려가서 다시 졸병으로 근무하는데 그 억울함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고 토로하기도 했었다. 또 하나는 성격이 워낙 호방하다 못해 과격하기까지 해서 간데 족족 상급자들과 좌충우돌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전임 학교에서 뭔가 뒤집어 엎어버리고 날려서 왔다는 것이다. 이른 바 사고 교사에 대한 인사 조치로 중간 발령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남한 8도 학교를 다 근무해보았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어디로, 어디로. 시도 간 인사교류는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워낙 타고난 것 때문에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였지만 워낙 재주가 출중해서 매일 방과 후 교사 옥상에서 학교 아이들에게 태권도와 쿵푸를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쾌남아이면서 풍운아였다.

   나도 초임 교사로 어디 딱히 정붙일 때도 없고 해서 급속히 그 선배교사와 가까워졌다.

읍내 우체국을 비롯한 다양한 직장의 직원들과도 활발히 교유해서 근처 놀이터 같은 데 도시락 사가지고 놀러 가기도 하고 가벼운 산행도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있는 하모니카를 빼 물고 멋진 한 곡조를 빼는 것이다. 트롯이면 트롯, 팝송이면 팝송, 심지어 라틴음악까지 연주하곤 했었다. 나도 그 때문에 덩달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게 사람 사는 거다 싶었다.

   그는 한마디로 내게 ‘사람이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 모델 케이스였다. 그가 하루는 회가 너무 먹고 싶다고 하면서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근처 냇가에 가서 훌훌 벗고 피라미며 송사리 등을 거의 손으로 잡아 올리다시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냥 비늘도 안 벗기고 자근자근 씹어서 꿀꺽 삼키는 게 아닌가. 나는 저러다 디스토마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동해안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회를 즐겨 먹었는데 여기 깊은 내륙이라서 그동안 회가 고팠다면서 그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지어 아이들과 같이 사제동행한다면서 들로 강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수렵한 민물고기 양이 차지 않을 때는 아이들보고 민물고기 잡아내도록 요구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래서 좀 말썽이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가 단골로 하는 멘트는 “인간이 가장 희극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실상 가장 비극적이다.”

   그는 속으로 무슨 큰 비극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기에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그 때는 잘 몰랐었다.

   그해가 끝나고 다음 해를 맞이했다. 다음 해는 내가 군에 영장을 받아 놓은 상태다. 내가 6월 하순 경에 입대한다고 하니 그 선배 교사는 나보고 두 가지를 충고해 주었다. 하나는 여름 훈련이기 때문에 체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체력 보강을 위해서 고칼로리로 보하는 보신탕을 하루에 한 끼 정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기가 차려 놓은 도장에 나오면 무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잘 안 맞아서 출근하기 전 새벽에 들르면 1대1 개인지도 해 주겠다고 했다. 후배한테 큰 후의를 베푸는 셈이다. 보신탕 먹는 것은 곧 실행에 옮겼다. 학교 아래 전에 몇 번 갔던 보신탕 식당에 기식을 부탁해서 열심히 먹어댔다. 아침도, 점심도, 심지어 저녁도 보신탕이었다. 혹서기 훈련소 훈련 극복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라 생각하니 먹을 만 했다. 심지어 맛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쿵푸 연마는 한 달을 가지 못했다. 내가 워낙 운동신경이 둔하다 보니 가장 간단한 동작도 익히는데 몇날 며칠 걸리니 사범보다 내가 더 재미없고 지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배운 동작도 또 얼마 안 가서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해 버렸다. 지금도 가장 기초가 되는 당랑권인가 하는 몇 가지 동작의 이미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그런 육체적 동작을 익히는데 그렇게 소양이 없는 줄 그 때야 비로소 알았다. 군에 가서도 근무 기간 내내 총검술, 태권도가 훈련의 기본인데 잘 안 되어서 창피당하고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해 여름 살인적 더위에도 견딘 것은 그 선배의 충고를 조금이라도 수용한 덕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물론 그 후 3년 내내 나의 군 생활을 잘 버티게 해 준 멘토 역할을 한 그를 교단에서의 ‘나의 전설(傳說)’로 기억하고 싶다.                                                   2020. 6. 18.